라면의 황제
김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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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진짜 최고의 음식이었어. 아마 자네들은 상상도 못 하겠지, 그 따뜻한 국물 맛을."

어쨌거나, 그들이 꽃을 두고 간 묘비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김기수

1957-2013

27년간 오직 라면만 먹은 자, 여기 잠들다

                                                                            -라면의 황제 중에서

라면의 황제라는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더니, 이건 뭐 라면이 사라진 시대를 그리고 있는 기상천외한 설정부터 눈에 띈다. 기름에 튀겨 건조시킨 면과 각종 첨가물이 들어간 수프가 수만 가지 질병을 비롯해 우울증이나 폭력 같은 정신질환까지 유발한다는 결과가 이어져 결국 라면 유해론은 라면을 사라지게 만든다. 그 와중에 김기수라는 인물은 라면만 먹으며 오래 버티기 분야의 기네스북 신기록을 수립할 뻔한 사람이었다. 김기수는 정확히 30세가 되던 해 가을부터 라면만을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증언에 의하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했던 식사 역시 계란과 파를 듬뿍 넣어 끓인 라면이었다고. 그가 밥보다 라면을 훨씬 더 많이 먹고, 어른이 되어서는 라면 가게를 차리고, 열심히 라면만 먹으며 오래 버티기 분야의 신기록 수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 그는 그것을 구청 문화 강좌를 들으면서 깨닫는다. "만약 두 가지 일이 우연히 동시에 일어난다면 거기엔 분명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운명적 관계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성공했다"는 강의를 들으며 말이다. 그건 바로 자신이 1957 8 25일에 태어났기 때문이었는데, 그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바로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면이 처음 만들어졌던 날이란다. 그러던 그는 결국 자서전 겸 식당 홍보책자였던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이라는 책도 출간하게 되는데, 이 단편은 이 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짧은 이야기이다. 그가 왜 라면만을 먹기 시작했는가로 시작한 이야기는 그가 왜 라면만을 먹지 않을 없었는가로 이어진다.

동물보호법 위반. 이게 내 죄명이었다. 벌금은 3백만 원.

판사가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숙이고 서 있었다. 내 계획을 아무도 알게 해선 안 되게, 개를 학대한 악마 같은 놈으로 오해 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손자라는 사람이 말했다. 나는 개를 알고 또한 나도 안다. 그러니 이제 앞으로 남은 건 백전백승뿐이다. 인류를 구하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요. 검사가 뭐라고 주절주절 떠들고, 판사가 또 무슨 이야기를 할 때, 몇 번이나 이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개들의 사생활 중에서

약국에서 일하며 프리온이라는 단백질에 대해 연구하는 스물일곱 살의 전형적인 북방몽골계 남자. 길에서 마주친 그의 얼굴을 기억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큼 평범한 외모의, 그러나 전혀 평범하지 않은 두뇌를 가진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미하일 불가꼬프의 <개의 심장>을 떠오르게 하는데, 인간의 놔하수체와 생식기를 개에게 이식을 한다는 기발한 발상 못지않게 재기발랄 한(?) 스토리가 당황스럽게 진행된다. 그는 개외 프리온 사이의 관계를 나름 간파하고, 홀로 외로운 실험과 연구를 계속해오고 있다.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줄 의무가 있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네 발 달린 모든 짐승과 인간까지도 감염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오직 개들에게만은 결코 전염되지 않는 기이한 단백질 덩어리. 그는 프리온의 진짜 의미를 알아내려면 개에게 주목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물론 아버지에게 "개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을 들으며, 의사들이 차트에 "전형적인 경계선 인격장애. 호전의 기미 없음."이라고 평가하는 인물이라 독자인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오롯이 믿으며 따라가기는 다소 어렵지만 말이다.

이 작품집은 외계인, W, 호화로운 카펫, 외국인()과 외국인 노동자, 국민교육헌장, 대형 마트, 그리고 라면으로 이어지는 다소 황당하고, 생뚱 맞아 보이는 소재로 기이한 이야기들이 전개되고 있다. 세상을 둘러보면 곳곳에 숨어 있는 기이한 이야기들의 집합체 같다고나 할까.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지만 어느새 사람들에게 잊혀진 가십거리 같은 것들의 종합선물세트 같기도 하고. 우리는 왜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을까. 작은 도시에 대형 맡는 왜 많아지나? 외계인은 외계''일까? 등등.. 따지고 보면 세상은 미스터리 천지이다. 그저 매일같이 사는 게 바빠서 무심코 지나치거나, 뭐 그런 걸 궁금해하냐고 무시하거나, 못본 척 지나치거나, 아는 것처럼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그렇지 말이다. 세상에 대해 시시콜콜 오지랖을 펼치는 작가의 이야기는 그래서 당혹스럽거나, 유쾌하거나, 어이없거나, 재미있다. 뭐 한마디로 색다른 작품을 보고 싶었다면 대 환영, 그렇지 않다면 대략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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