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배수아 글.사진, 베르너 프리치 사진 / 가쎄(GASSE)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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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녀는 잠자는 남자로부터 다가올 봄에 LA에서 만나자는 메일을 받는다. 잠자는 남자는 글을 쓰는 작가이면서 영화를 찍는 독일 영화감독(베르너 프리치)이고, 극중 화자인 나(배수아)는 그의 촬영을 돕는다. 그들은 6년 전부터 그렇게 종종 촬영여행을 떠나곤 했다. 카메라 앞에서 그들은 지난밤 꿈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비밀과 기억에 대해 말하곤 한다. 이 작품은 배수아 작가가 ''을 필름에 담고자 하는 그와 LA에서 함께 보낸 일주일간의 매혹적인 여행 에세이이다. 화자인 ''가 여행길에서 읽고 있는 조르주 페렉의 소설 <잠자는 남자>의 페이지가    종종 펼쳐지는 이 여행기는 뭐랄까,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롭고, 고혹적이다. 여행에 관한 숱한 글을 읽었었지만, 이토록 황홀한 여행기는 난생 처음이다. 페이지 곳곳에 '잠자는 남자' ''가 실제로 촬영한 이미지 컷들이 실려 있어 글로 묘사된 것들이 고스란히 보여진다.

그녀는 여행 가방을 쌀 때, 꼭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가져가는 스타일이다. 옷가지 사이에 책을 서너 권 넣고, 화장품과 세면도구, 속옷, 스타킹, 두통약, 수면제, 모자, 머플러, 그리고 거울이 전부이다. 그의 여행 가방에는 항상 작은 도서관이 통째로 들어있다. 책과 영화 필름으로 가득한 그의 가방은 돌덩이가 든 것처럼 무겁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이동 도서관처럼 가방을 운반해서 끌고 온다.

특히나 마음에 드는 건 잠자는 남자의 여행법과 배수아 작가의 여행에 대한 의미였다.

잠자는 남자의 여행법은 이렇다.

드림 호텔에 도착한 첫날, 늘 그렇듯이 잠자는 남자는 제일 먼저 여행 가방에서 책들을 꺼낸다. 그리고 집에서의 습관 그대로 책들을 각각의 장소에 배치한다. 침대 사이드 테이블에는 잠들기 전에 읽을 책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직 후 아침 햇살 속에서 가장 먼저 펼쳐 들 하루의 첫 책들을 골라 놓는다. 욕조 곁에도 한 두 권의 책이 있다. 목욕하면서 읽을 책들이다

그렇게 소파 테이블에도, 거실과 주방을 연결하는 카운터에도, 호텔 객실의 모든 공간에 책들이 놓여진다. 그는 심지어 사람들이 개나 고양이를 이불 속으로 데리고 오듯이 책들을 이불 속으로 데리고 들어온다고. 그렇게 잠자는 남자는 그 모든 책들을 여행길에 늘 들고 다니는데, .. 부러웠다. 사실 나도 배수아 작가처럼 여행 가방을 쌀 때는 최소한의 것들만 가져가려고 한다. 뭔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현지에서 구매하는 방법으로, 갈 때는 가볍게 올 때는 무겁게. 가 컨셉이다. 그러다 보니 항상 여행 전날 밤늦게까지 고민하는 것은 바로 무슨 책을 가져갈까 하는 것이다. 아직 읽지 않은 새 책을 가져가자니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비행시간이 지루해진다는 단점이 있고, 이미 읽었던 내가 좋아하는 책을 가져가자니 두께가 만만치가 않아 무거울 것 같고 말이다. 그러다 결국 종이 책을 포기하고 이북을 가득 다운로드 받아서 아이패드를 가져갔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낯선 여행지에서 익숙한 책을 가져가는 것은 친구, 가족 이상의 위안이자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잠자는 남자가 책을 잔뜩 가져가서 객실 이곳 저곳에 책을 놓아두는 것이 백 퍼센트 공감이 된다는 얘기다. 물론 무게 때문에 현실에서 따라 해보기는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배수아 작가에게 여행이란 이런 의미이다.

여행자가 길 위에 있듯이, 내 삶은 내가 쓰는 글 위에 있어요. 종종 여행지에서 나는 내 글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그 미래를 예감하곤 합니다.

여행을 떠날 때, 나는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하나의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한두 개의, 특정 장소와 관련된 어휘를 떠올리기 위해서 장소를 옮겨 다닐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정 나라에서 어떤 단어를 떠올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 단어는 다른 곳에 있었다면 아마도 떠올리지 않았을 단어이니까. 뿐만 아니라 여행지에서 무심하게 관찰한 것들, 샀던 물건들, 들었던 소리들, 냄새들이 자신의 무의식 저 깊은 곳에서 그 장소와 관련하여 훨씬 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점이다. 어쩌면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각성으로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아지고, 사고가 예민해지고, 또렷해져서 가능한 많은 것들을 눈 속에 담고, 머릿속으로 기억하고, 가슴으로 느끼려고 하는 그 순간들 말이다. 그곳이 아니면 절대 느끼지 못할 감각

혹시 밤중에 우연히 잠에서 깨어난다면, 그때 카메라로 내 잠을 찍어 줄 수 있겠어?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완전한 잠이어야 해. 잠든 척하고 있거나, 잠에서 깨어나 버리는 순간이 없는 순수한 잠을 촬영하고 싶어.

잠자는 남자는 자기 자신의 잠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어, 그녀에게 촬영여행을 떠나 이렇게 말한다. 우연히 잠에서 깨면 카메라로 자신의 잠을 찍어 달라고. 그러나 그녀는 아직 한 번도 잠자는 남자의 잠을 촬영하지 못했다. 그녀가 잠에서 깨었는데, 그가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경우가 한 번도 없었던 탓이다. 그의 잠은 매우 희박하고 불완전해서, 그녀가 몸을 일으킬 때 침대의 미세한 흔들림이나, 화장실로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쉽게 깨어나 버리곤 했다. 언젠가 그가 순수한 잠을 촬영할 수 있을지 아직 그려지지 않은 그들의 앞으로의 여행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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