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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평점 :
통계학적으로 말하자면,
1960년대 소웨토에서 태어난 까막눈이 여자가 자라나서,
어느 날 감자 트럭에서 스웨덴 국왕과 수상을 만나게 될 확률은
45,766,212,810분의 1이다.
이는 위에서 말한 까막눈이 여자의 계산에 의한 것이다.
다섯 살 때부터 공동변소에서 똥을 치우며 생계를 이어야 했던 놈베코.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잉태된 지 20분 뒤에 사라져버렸고, 현실을 잊어버리려 환각제와 알코올에 의존했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일찍 떠나버린다. 공동변소의 관리소장이 해고되면서 어린 그녀가 그 자리를 이어가게 되지만, 까막눈이인 주제에 수에 대한 감각으로 셈을 할 줄 아는 능력을 타고났기에 결국 위생 국 직원의 눈에 거슬리게 된다. 문학애호가인 옆집 호색한과 라디오를 통해 글과 말을 깨우친 놈베코는 강도에게 습격 당해 죽은 호색한의 집에서 수백만 달러어치의 다이아몬드를 발견해 그걸로 빈민촌을 탈출하고야 만다. 그러나 놈베코의 열다섯 번째 생일 다음 날, 그녀가 길을 떠난 지 약 여섯 시간 만에 엔지니어의 차에 치이고 만다. 엔지니어는 브랜디를 잔뜩 마신 상태에서 운전을 했지만, 법정은 그녀가 백인의 차에 치인 죄를 범했기에 운전자에게 정신적 피해를 끼친 데에 대한 벌금, 훼손된 차체에 대한 수리비를 지불하라는 것으로 판결이 떨어진다. 놈베코에게 다이아몬드는 있었으나 그것은 훔친 것이었으므로 자칫 절도 혐의로 투옥될 수도 있었기에, 그녀에겐 수리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고, 죗값을 치르기 위해 엔지니어가 책임자로 있는 이중 철책으로 둘러싸인 비밀 핵무기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하게 된다
이렇게나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이야기에 할애된 분량은 겨우 이 책의 15프로 정도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그러니까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라는 말이다. 어떻게 해서 까막눈이에 공동변소에서 똥을 치우던 어린 소녀가, 지금은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7년 3개월 20일을 죄값으로 일해야 하는 처지인 그녀가, 스웨덴 국왕과 수상을 만나게 되는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상상이 안 될 정도의 상황인데, 이야기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굴러간다. 이 스토리는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전개를 완전히 벗어나면서 전개가 되는데, 기발한 상상력은 우리를 포복절도하게 만들면서 페이지를 쓱쓱 넘어가게 만들어준다. 킬킬대며 웃다가, 다음 상황이 궁금해서 조바심을 내다가 보면 어느 샌가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한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비록 꼼짝 못 하고 갇혀 있는 신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삶에서 밝은 부분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게 놈베코의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저 사기꾼 판 데르 베스타위전이 얼마나 더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꽤나 재미난 일이 아니겠는가?
따지고 보면 그녀의 현재 삶은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책을 읽고, 복도를 몇 군데 청소하고, 재떨이를 몇 개 비우고, 연구팀의 분석 자료를 읽고, 또 엔지니어가 이해할 수 있게끔 쉬운 내용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게 그녀의 일과였다.
솔직히 공동변소의 우울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자마자 술에 취한 운전자의 차에 치이고, 손해배상을 받아보 모자랄 판에 억울한 판결을 받고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청소부 일을 해야 죄값을 치를 수 있는 상황이라면, 열다섯 놈베코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앞으로의 삶에 희망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놈베코는 단순히 영리한 것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긍정적인 캐릭터였다. 어쩌면 그래서 그녀의 삶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쑥쑥 흘러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가끔은 당황스러울 만큼 그 어떤 것도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다. 놈베코 주변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특이한 인물들이 잔뜩 모여 있다. 남아공 최고의 핵 전문가이지만 정작 간단한 수식조차 모를 만큼 멍청했던 술꾼, 둘 중 하나만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쌍둥이 형제 홀예르 1, 홀예르 2, CIA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불안 증에 걸린 미국인,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짝퉁 사기〉를 일삼는 중국 여자들, 세상 모든 일에 분통을 터뜨리는 소녀, 자신의 태생은 백작부인이라는 환상에 젖어 살아온 감자 농사꾼 등등.. 이들은 핵폭탄을 매개로 서로 얽히게 되는데 그 중심에는 신분적으로 가장 낮은 존재인 까막눈이 흑인 소녀가 있다. 이들의 균형을 맞춰가며, 세계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서 말이다.
연구소에서 청소를 하는 놈베코가 핵폭탄 개발에 관여하게 된 계기도 매우 재미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핵폭탄 하나를 그녀가 떠안게 된 상황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사연이 숨어 있다. 물론 그건 직접 책을 읽어봐야만 한다. 전작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급변하는 현대사의 주요 장면마다 본의 아니게 끼어들어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는 요절복통 스토리를 선보였던 것만큼이나, 이번 작품에서도 기대를 져버리지 않으니 말이다. 솔직히 전작보다 이번 작품이 쬐끔 더 재미있었다고 말하고 싶을 만큼, 유쾌하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특히나 놈베코는 최근에 만난 캐릭터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멋진 여성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자신 앞에 연이어 나타나는 불행한 사건들을 너무도 아무렇지 않고, 어쩌면 그리 지혜롭게 헤쳐나가는지 독자들이 그 복잡한 상황에 우울해할 틈도 없이 어려움을 타개해나가는 모습은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사실 세상의 진정한 아이러니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틈에서 어수룩해 보이고, 모자라 보이지만, 실제로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