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나 1997 - 상 - 어느 유부녀의 비밀 일기
용감한자매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난 결국 엄마의 바람대로 '시집이나 가서 남편 돈으로 생활하며 편하게 취미로 소설이나 쓰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결혼하면서 글쓰기는 아예 포기해버렸다. 글은커녕 내 삶을 지탱하기도 힘들었으니까.

나름 굴곡 많은 결혼 생활에서 겨우 버텨냈다 싶었는데, 마흔이었다. 작년에는 친구들이 마련해준 마흔 번째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두고 대성통곡했지. 이렇게 한 해, 한 해 무의미한 존재로 소멸해버리나 싶었다. 한 해, 한 해 늙어갈 테고, 무능해질 테고, 무감각해질 테지, 싶어서. 

 

송지연,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 실연의 아픔으로 썼던 소설 '줄리아나 1997'이 공모전에 당선되어 책으로 출간되지만, 그 이후로는 단 한 권도 쓰지 못한 소설가이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에 살림을 꾸리다가 보니 글을 쓰고자 했던 열망은 어느 샌가 사그라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흔한 살의 어느 날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책을 소개하고 싶다고 연락이 오고, 그녀는 그 방송을 계기로 자신의 인생이 뭔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은 얼마 되지 않아 막을 내리고, 그 쫑 파티에 서 유명한 남성 패션 잡지 <트렌디>의 편집장인 진수현을 만나게 된다. 그 이후 어느 유부녀의 발칙한 비밀일기가 시작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핸드폰도, 인터넷도, 내비게이션도, 케이블 방송도 없던 시절, 그녀는 줄리아나 나이트클럽을 몇 년 동안이나 주름잡았었다. 자칭 타칭 '줄리아나 오자매'라고 이름이 붙은 친구들과 함께 말이다. 어림잡아 매주 한 번씩 갔다고 하니 말 그대로 줄리아나 죽순이였던 것이다. 줄리아나 오자매는 모두 이대생이었는데, 송지연과 박은영은 국문학고, 김정아는 법학과, 이세화는 영문학과, 황진희는 비서학과였다. 로펌 대표 아버지에 자신도 잘나가는 로펌 변호사인 정아, 광고대행사에서 인정받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은영, 줄리아나에 처음 이들을 인도하고, 제일 먼저 줄리아나를 졸업했던 세화, 미모와 관능으로 남자들을 홀렸던, 현재는 '줄리아나 바' 사장인 진희까지.. 이들 중에 유난히 남자 복이 없었던 은영만 아직 미혼인 상태이다. 학창시절에 좀 놀아본, 화려하게 그 시절을 보냈던 이들일수록 좋은 남자 만나서 착실한 아내로 살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누군가 그랬던가. 이들은 모두 20년 후 각자의 삶을 나름 성공적인 모습으로 살아내고 있다. 그러나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그녀들의 인생 역시 가까이서 보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결혼이란 틀에 들어와 14년을 살면서 억울함과 분함이 생겼다. 남편의 희로애락에 나의 희로애락이 맞춰졌고, 남편의 결정에 내 운명이 좌지우지되었다. 남편이 멋대로 투자했다가 전 재산을 들어먹어도 나는 내조 못하는 와이프가 됐고, 남편이 어린 여자랑 바람이 나도 나는 남편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아내가 되었다. 절망과 무기력함이 나를 짓눌렀다. 페미니스트도 아닌 평범한 대한민국 여자인 나에게 저항의 기운이 가득 찼다.

하지만 수현을 만나면서 난 희망과 생기가 생겼다. 바람 피우고 들어온 남편을 보고도 생긋생긋 웃어주는 여유도 생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독립적인 여자로 사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기쁨과 희망을 얻었는데, 그는 나 때문에 집에서 나왔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수현을 만나면서 스스로의 자존 감을 되찾은 것 같다고 고민하는 지연에게, 정아가 말한다. 핑계 대지 말라고. 아무리 미화시켜도 넌 바람 피우는 거고, 불륜은 합리화시킬 만한 일은 아니라고. 그 만남이 너한테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면 죄책감은 덜어지겠지만, 너는 그를 만나기 전에도 독립적인 여자였다고 말이다. 물론 수현과 헤어지는 것도, 아이를 버리고 남편과 이혼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연을 포함해서 이들 다섯 명 친구들의 사연을 하나씩 읽어보다 보면 공감이 되는 것도, 그럴 수 있겠다 싶은 것도 많았던 이유가 다소 전형적인 갈등 전개 때문이 아니었다 싶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자들의 이야기이기에 적나라한 묘사도 있고, 막장 드라마에서처럼 비현실적인 인물들도 있다. 한없이 외설스럽게도 느껴지다가 순정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순애보를 보이는 인물 때문에 이들이 40대인지, 20대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장점은 분명하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보면서 하루의 피로를 잊어버리곤 하는 드라마들처럼, 별 생각 없이 가볍게 읽기엔 최고의 페이지 터너 이긴 하다는 것이다.

 

언젠가 친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진정한 막장 드라마를 보려면 고전 소설을 읽으면 된다고. 그러면서 위대한 고전으로 칭송 받는 몇몇 작품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런 소설이 진정한 막장 드라마의 시초라고 했었다. 무슨 소리냐며 처음엔 갸우뚱하다가 그 작품들의 스토리라인을 떠올려보면서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던 기억이 난다. 불륜부터 시작해서 출생의 비밀, 억지스런 우연의 남발 등 소위 현대판 막장 드라마에서 너무도 자주 사용하는 장치들이 우리의 위대한 고전에도 항상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막장과 문학의 차이는 '스토리'가 아니라 '문학적 표현'의 깊이였을 것이다. 엄청나게 디테일한 장면 묘사와 심리 묘사는 페이지 넘어가는 속도를 더디게 만들어주고, 평범한 스토리에도 문학적인 깊이를 주고 행간의 숨겨진 뜻을 헤아리게 만들어주니 말이다. <줄리아나 1997>은 명백하게 전자이다. 문학적인 표현들은 싹 걷어내고, 티비 드라마 처럼 인물들의 대사와 스토리전개에 비중을 두어 속도감은 최고이다. 그러나 마냥 막장으로 치부하기엔 좀 아쉽긴 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누군가에겐 '사랑과 전쟁'이 될 수도, 누군가에겐 '섹스 앤 더 시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도가 어떨까. 노골적이고, 솔직해서 트렌디하게 느껴질 수도, 어디서 본 듯한 뻔한 갈등 구조에 심심함을 느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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