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살인
엘리자베스 조지 지음, 김정민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국내에 처음 번역되어 출간되는 장르소설 작가들의 책은 무조건 읽어보려고 하는 편이다. 물론 나에게 검증되지 않은 작가이므로 때로는 실망하지만, 가끔은 상상도 못한 보석을 발견하게 되는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난 엘리자베스 조지의 <성스러운 살인>은 완벽하게 잘 쓰인 미스터리 물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예측 불가능하고 매혹적인 인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오롯하게 캐릭터의, 캐릭터를 위한, 캐릭터에 의한 작품을 만난 듯한 기분이다. 그동안 숱한 장르 소설을 탐독했던 나는, 이 작품 속의 토머스 린리 경위와 바버라 하버스 경사, 둘 사이의 파트너 십을 그 이전의 어떤 작품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배경은 마치 오래된 미스터리 물 같은데, 그 속에 굉장히 모던한 오늘날의 두 형사를 투입했다고나 할까. 사실 뭐 이런 캐릭터가 다 있어. 로 시작해서 작품이 끝날 무렵 즈음에는 이들에게 아주 푹 빠져서 그들이 실재한다면 어떨까.하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이 작품은 영국 BBC와 미국 PBS 인기 드라마린리 경위 시리즈원작이며, 린리 경위 시리즈는 현재까지 무려 18권이나 출간되었다. 20년 넘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캐릭터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결과일 것이다.

 

 

숲과 목초지의 지극히 안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에워싸여 있는 마을에서 머리가 없는 사체가 발견된다. 사건 현장인 농장에서는 아버지의 사체 앞에 앉아 있던 딸 로버타가 있었다. 그녀가 내뱉은 소름 끼치는 한 마디.

 

"제가 했어요.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 말 뒤로 입을 닫아버리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로버타가 아버지를 죽였을 리 없다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린리와 바버라가 팀이 되어 파견된다. 그러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순탄치 않다. 그들이 팀을 이루게 되고 처음 만나게 되는 순간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늘에 안전하게 숨은 채 바버라는 린리가 다가오는 걸 지켜봤다. 그의 동작은 고양이같이 우아하고 여유로웠다. 바버라가 본 남자 가운데 단연 최고의 미남이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혐오했다.

 

어쩌면 토머스 린리 경위와 바버라 하버스 경사의 관계가 여타의 추리 소설 속에서처럼 평범하고 정상적이었다면 엘리자베스 조지의 이야기도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 속에서 미스터리적인 부분과 사건을 해결하는 부분도 충분히 흥미롭긴 하지만, 사실 그 플롯 자체가 새로운 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건을 추리하고,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두 인물이 결합하는 방식, 그가 그녀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는 방식, 그녀가 스스로로 하여금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도록 내버려두는 방식 같은 것들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인물에 대한 묘사와 그들의 관계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작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사건 해결을 위해 켈데일에 가기까지 무려 백 페이지가 넘는 부분이 할애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추리 소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충분히 진행되고 나서야, 직접적인 수사 과정을 만날 수가 있지만, 아이러니한 건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이다.

 

 

토머스 린리는 귀족 가문의 엘리트 미남 형사로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다. 바버라 하버스는 노동자 계층의 까칠한 추녀로 자격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옥스퍼드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사립학교 출신다운 고상한 말씨에, 빵빵한 족보를 가진 상류층에다, 총명함과 넘치는 매력까지 가진 그의 곁에는 여자가 끊이지 않는다. 부서를 가리지 않고 여자들과 잠자리를 했으므로 그는 씨받이 경주마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 관한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나이 서른인 그녀는 확실히 매력 없는 외모를 지니기도 했지만, 스스로 전혀 꾸미지 않는데다 못마땅한 듯 찡그려진 채 굳게 앙다물어져 표정 덕분에 전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니 바버라 입장에서는 상사들이 린리에게 사건을 맡기고 싶었으나, 여자 수사관도 필요했고, 범죄 수사부 여자 가운데 린리 주변에서 안전할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므로 그 대단한 린리 옆에 있어도 정숙이라는 두 글자에 먹칠하지 않을 유일한 행운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선택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하버스에 대해 알고 있었다. 누구나 그녀에 대해 알았다. 그녀는 신속하게 맥퍼슨, 스튜어트, 그리고 헤일을 떠밀어내며 범죄 수사 부에서 신임 시절부터 참혹한 실패를 기록해왔다. 세 사람은 다들 함께 일했으면 하고 바라는 가장 무던한 경위들이었다. 특히 맥퍼슨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유연한 유머와 아버지 같은 푸근함을 지녔는데, 하버스 같은 사람에게 특별한 멘토가 되고도 남았다. 그는 살아 있는 곰돌이 인형이었다. 그와 함께 일하는 데 실패한 경사들이 있었던가? 하버스 딱 한 사람뿐.

 

이 대목은 린리를 포함해서 범죄 수사부 대다수가 바버라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녀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게다가 그녀는 <제가 은행에 돈을 쌓아놓고 이름에 귀족 직함이 붙고 눈에 뵈는 대로 여자, 남자, 아이, 또는 동물까지도 잠자리에 끌어들이길 마다하지 않는다면 전 경정님의 귀하신 부서에서 일할 자격이 충분하겠죠.> 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못생긴 외모와 가정사로 인해 콤플렉스로 똘똘 뭉쳐진 상태이다. 재미있는 건 린리의 성격이다. 그는 자신을 비웃는 말에도 가벼운 어투로 농담을 할 줄 아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린리를 지독히 증오하는 니즈 총경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그에게 악담을 퍼부을 때도 그는 유유자약하다.

 

바버라는 타인을 공격하려는 남자의 욕구를, 또는 그 욕구를 완성시키려는 인간 본연의 야만성을 그토록 적나라하게 접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 그 실체를 니즈를 통해 그의 태도에서, 독수리 발톱 같은 손가락을 엉거주춤 말아 쥔 주먹에서, 목에 돋아 꿈틀거리는 핏줄에서 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린리의 반응이었다. 처음에 잠깐 긴장하고 난 뒤, 린리는 비정상적으로 태연자약했다. 때문에 니즈의 화가 더욱 격렬해지는 듯했다.

 

왜냐하면 린리는 니즈가 스트레스를 받아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다는 점을 이해하기 때문에, 5년 전의 대립에 관해 원색적으로 조롱을 퍼부어대는 일이 그자에게 잠깐만이라도 스트레스를 벗어나게 해준다면, 그에게 기꺼이 그 자유를 주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다른 이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태도이지만 말이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고, 참을 수 없는 진실 앞에서도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는, 게다가 신분의 차이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의 아픔까지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그가, 평범하고 땅딸막한 여자, 세상을 못마땅해하고, 억울해하고, 친구도 없고 완전히 혼자인 바버라와의 파트너 쉽은 쉽지 않다. 좌충우돌, 이리저리 뒤죽박죽 그들의 관계는 어디로 튈지 모르게 흘러간다. 그들이 수사 과정에서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스스로를 극복해가며,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BBC 드라마 속의 린리와 바버라의 이미지는 책 속의 그것 과는 조금 차이가 있긴 하다. 일단 바버라가 심각한 자격지심에 빠져서 심사가 꼬여 있을 정도로 못생긴 얼굴이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으니까. 린리도 조금 더 젊고 스마트한 이미지라고 상상했는데 그에 비하면 좀 느글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페이지 속의 글자를 읽으면서 그 캐릭터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상상하게 만드는 그 힘이 아닐까 싶다. , 생각해보자.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등의 캐릭터들을 생각하면 거의 즉각적으로 그 인물들이 실재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말하자면 이들은 일 차원의 피상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페이지 바깥으로 튀어나와 실제 하는 인물이 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지 않는 아이들도 조앤 K.롤링의 <해리 포터>를 미친 듯이 읽어대는 것은 바로 흥미로운 상황에 놓인 매력적인 인물 때문이다. 아마 플롯으로 기억되는 책은 백 년에 몇 권도 안 나올 것이다. 독자들의 뇌리에 남는 것은 플롯이 아니라 캐릭터이니 말이다.

 

바야흐로 캐릭터의 시대이다. 얼마 전에 시즌 3가 방영된 BBC의 셜록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19세기 명탐정 셜록 홈스를 21세기로 멋지게 소환해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정 캐릭터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TV와 영화를 통해서 셜록을 연기했던 수많은 배우들이 모두 다 이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아니란 걸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70여명의 배우들이 연기했던 셜록 홈스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셜록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가장 큰 매력은 프록코트를 입고 스마트 폰, 노트북 등 디지털 기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엄청나게 빠른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쏟아내 상대방의 혼을 쏙 빼놓는, 이른바 소시오 패스라는 21세기형 캐릭터라는 점일 것이다. 배우가 가지고 있는 외모적인 개성마저도 정서적으로 코난 도일의 원작 속의 홈즈 처럼 느껴지게 만들 정도이니 말이다. 이렇게 잘 구축된 캐릭터는 스토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동일한 상황이라도 인물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에, 플롯은 주로 인물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인물이 키 포인트인 것이다. 등장인물이 작품 속 캐릭터가 아니라 독자들의 친구가 된다면, 그 인물은 한 번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정말 잘 만든 작품은 스토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품이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야기에 푹 빠질 숨은 독자들까지 끌어들 일 수 있는 방법, 그 마법의 열쇠가 바로 인물인 것이고, 이 작품은 충분히 그럴만한 마법을 일으키고 있다. 린리 경위 시리즈의 다음 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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