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 밤 운 좋게 멋진 운명을 만난 게 아닐까요. 오늘밤 이 살롱에서 갑자기 우리 위에 찾아온 일.. 아마 이런 기적적인 운명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 아뇨, 또 어딘가에서 파리나 도쿄 같은 데서 만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랬다가는 모처럼 오늘 밤 하늘이 제게 주신 순수함과 용기가 제 빛을 잃어버릴 것 같아 두려워요."
파리의 음울한 겨울, 강한 바람과 굵직한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씨였다, 섬광이 번쩍이며 천둥이 치고, 갑작스런 정전으로 샹들리에의 빛이 모두 꺼진다. 고딕풍의 호텔, 새카만 어둠에 감싸인 살롱 안에 처음 만난 남자와 여자 단 두 사람만 있었다. 의자와 테이블 윤곽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암흑 속에 말이다. 다이고와 후미코는 그렇게 만난다. 마치 모든 것이 처음부터 예정되었던 운명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짧은 사랑을 나눈 두 사람은 가장 소중한 마음 깊숙한 곳을 열어 비밀을 말해준다. 그 순간만큼은 처음 만난 그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후미코의 바램은 한 여자를 죽이고 싶은 것이었고, 다이고도 역시 한 남자가 죽어주면 좋겠다고 자신의 바램을 얘기한다.
오직 암흑 속에서의 딱 한번 만남뿐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처럼 그렇게 말이다. 그러나 다시 귀국 후 일상으로 돌아간 다이고는 후미코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살인 사건, 다이고가 살의를 품었던 그의 교수가 죽는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가 용의자로 지목되지만, 그에게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다. 물론 알리바이는 그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여자가 만들어준 것이다. 남자는 후미코를 떠올리고, 그녀의 대상을 찾아 나선다. 그녀의 바램대로 한 여자를 죽이고, 다시 한번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작은 소망으로.
인간은 평생을 살며 단 몇 번만 반짝반짝 빛나는 영원을 만날 기회를 잡는다. 그 기회에 용감하게 결단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빈곤하게 퇴색된 일상성의 먼지 속에 묻혀 생을 마쳐야 한다. 일생 선택받은 인간이 될 수 없다.
후미코야말로 다이고의 '영원'이었다.
언젠가 그것을 내 손에 넣기 전까지는 어떤 고독이든 견뎌야 하는가.
후미코의 모습, 정확히 말하면 다이고의 지각이 만들어 낸 그녀의 이미지가 가슴을 에워쌌을 때, 고독은 눈물겨운 적막함으로 바뀌었다.
단순히 상황만 놓고 보자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단 한 순간의 만남으로, 남자는 여자를 위해, 남자는 여자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대체 인간은 그렇게까지 자신 외의 인간을 믿을 수 있는 존재일까? 순수함을 넘어, 다소 무모해보이기까지 하는 다이고의 후미코에 대한 믿음,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나쓰키 시즈코가 그려내는 인물들의 감정선은 매우 섬세하고, 나라도 이런 분위기라면 그럴꺼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어 준다.
마지막에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미스터리이지만, 작품은 시종일관 매우 우아하다. 마치 프랑스 풍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디저트를 먹는 기분이랄까. 고풍스럽고, 우아하고, 침착하게 차곡차곡 감정의 결을 쌓아 올려서 결국 팡. 터지게 만드는 그 힘이라니. 마지막 다이고의 후미코의 만남은 미스터리 소설이라기보다 차라리 연애소설의 한 장면처럼 슬프다. 304페이지짜리 가벼운 두께이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 남는 여운은 마치 진한 커피를 한잔 마신 것처럼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