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양영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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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읽는데, 뮤지컬 헤드윅의 넘버가 생각이 났다. 아주 오랜 옛날, 두 쌍의 팔과 두 쌍의 다리를 가진 사람, 하나로 된 머리 안에 두 개의 얼굴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제우스가 그들을 반쪽으로 갈라 영원히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는 그 슬픈 이야기말이다. 이 작품에도 플라톤이 말한 양성 인간에 대한 언급이 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안에 있었고, 신들에 의해 둘로 갈라졌다는, 그래서 우리는 평생 나머지 반쪽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란 숙명적으로 슬픔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기억해 두 개로 갈려진 후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봤어.
널 알 것 같은 그 모습 왜 기억할 수 없을까 피뭍은 얼굴 때문에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하지만 난 알아 니 영혼 그 속에 서린 그 슬픔 그것은 바로 나의 슬픔.
그건 고통, 심장이 저려오는 애절한 고통, 그건 사랑 그래 우린 다시 한 몸이 되기 위해 서로를 사랑해

-뮤지컬 헤드윅의 'the orogin of love' 중에서


이스마일 카다레는 이 작품에서 사랑이라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의 불안과 관계에서 빚어지는 내면의 불안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를 이처럼 섬세하고, 예리하게 그려내는 작품이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굉장히 매혹적인 작품이다.

 

공항으로 향하던 택시 한 대가 갑자기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탑스했던 한 쌍의 남녀는 바로 죽고,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한 운전기사는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 뒷좌석의 연인이 서로 힙겹게 키스를 하려했다고. 백미러에 비친 그 광경때문에 자신이 주의를 잃어서 사고가 난 것 같다고. 그들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인지, 혹은 남자를 겨냥한 정치적인 살인인지, 혹은 연인의 자살인지..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조사원이 파견되어 사건발생 40주전부터의 이야기를 치밀하게 조사한다. 십여년전부터 연인관계를 지속해오던 두 연인의 관계에 대해, 그들을 죽음으로 이끈 미스터리한 사고에 대해, 여러가지 정황조사로 시간이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같은 상황도, 각기 자신만의 해석으로 다르게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이쪽 방향에서 보는 시각과 저쪽 방향에서 보는 시점이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한 공간에 함께 있어도, 각자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생각하는 건 언제나 다르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나는 이 특별한 연인들의 관계를 구성하면서, 두 사람이 어떤 시간을 함께 보내고, 어떤 사랑의 행위를 하느냐보다는, 그들의 심리 상태에 주목하고 싶다.

 

<그 여자, 로베나>


두 사람은 소파에 엉거주춤 앉아 포옹했다. 왜 이 남자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 걸까? 어째서 이 남자는 늘 내가 자기 것이라고 확신하는 걸까? 남자의 눈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에 로베나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모든 게 다 부질없는 짓이야. 이 남자를 상대로는 절대 이길 수가 없어. 그럴 기회는 벌써 오래전에 지나갔고,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 로베나가 그보다 우월한 점이 있다면 그건 젊은 나이였다. 하지만 로베나는 한 번도 그 무기를 쓰지 않았다. 벨트 아래는 가격하지 않는 법이다.

 

<그 남자, 베스포르>


베스포르는 절대 잊지 못할 그날, 로베나가 저녁식사를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그가 앉은 소파에 앉는 순간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군. 그의 온 존재가 그렇게 외쳐대고 있었다.

베스포르에게 로베나는 감당하기 힘든 존재였다. 베스포르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기분이었다. 무슨 법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는 법의 보호망 바깥에 있었고, 그걸 확신했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모든 것을 드러내지 못하는, 불가능한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두 연인. 베스포르에 대한 로베나의 두려움, 그리고 로베나에 대한 베스포르의 두려움.. 금지된 삶이 너무 두려워서, 특히 하늘의 분노를 살까봐 두려운 나머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척하고 있는 두 연인. 그들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묘사한 단어, 단락들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연인과 하루에도 수많은 말을 나누지만, 어쩌면 그것은 절반뿐인 말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같이 겪는 사랑의 두려움에 대해 이렇게나 솔직하고, 예리하게 짚어낼 수 있다니.. 매 페이지마다 밑줄을 긋고 싶은 충동을 눌러야 했다. 이제까지 겪은 수많은 망설임, 의심, 헤어질까 말까 하는 생각,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혹은 어디서부터는 잘못되지 않은 것일까 하는 불안감까지... 사랑에 관한 수많은 책을 봤지만, 이 작품만큼 현실감있게 그려진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지금 현재 사랑에 빠진 상태라면, 꼭 한번은 읽어보길 권한다.


만일 나에게 두 번의 삶이 주어진다면
그 두 번의 삶 모두에서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겠어요. 라는 매혹적인 단언.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만 내뱉을 수 있는 허황된 거짓말. 하지만 누구도 두 번의 삶을 살 수는 없다.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는 서로에게 엄청난 믿음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반쪽짜리 불완전한 존재들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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