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트레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7
문지혁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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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기억을 가까스로 재구성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어쩌면 전수진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인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일부의 사실과 일부의 거짓, 혹은 과장이나 왜곡이나 편집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부분 그렇듯 우리는 자신의 삶을 서사화하고 그속에서 특정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통해 이 무의미한 삶을 어떻게든 견뎌내려고 하니까.              p.109


나는 몇 주 전에 아버지가 이사를 하면서 정리한 짐들을 소포로 받는다. 택배 상자 속에는 별의별 것들이 다 들어 있었는데, 대부분은 내가 유학 혹은 결혼 전에 쓰던 물건들이라서 마치 죽은 청년의 유품을 받아보는 기분이었다. 대학 때 열심히 듣던 CD 플레이어, 빛바랜 군복, 하드커버 다이어리, 영문과 교재, 스티커 사진 앨범, 시집,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원고 묶음, 출처를 알 수 없는 녹슨 은반지... 그 중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사진이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 로마의 콘도티 거리를 서성이던 청년의 뒷모습을 통해 나는 잊고 있었던 어떤 마음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그건 지난 세기의 일이었다. 


1999년 6월 종강 무렵, 나는 여행사에서 주최하는 오리엔테이션에 참석 중이었다. '내일로 떠나는 유럽 호텔팩 21'이라는 상품을 구매했고, 작은 공간에 열 명 남짓한 청년들이 모였다. 한 달 뒤 7월 1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는 런던행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고, 그렇게 유럽 여행의 여정이 시작된다. 숙소만 정해놓고 자유 일정으로 돌아다니는 '호텔팩'이었기에, 매일 마음 맞는 사람들과 즉흥적으로 일행이 편성되었다. 나는 여행기간 동안 틈틈이 소설을 쓰곤 했다. 여행에서 들렀던 장소들을 묘사하고, 여행중에 만났던 사람들이 이름만 바꿔서 소설 속에 등장했다. 사실 내가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만났던 O가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나서 했던 말, "우리도 언젠가, 빈에 가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O가 헤어지면서 줬던 은반지를 가지고 유럽에 와서 제대로 이별하고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작은 은반지는 결국 니스의 에메랄드색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과연 나는 그 여행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정리했을까. 




그들은 자신의 여행을 말할 때 수줍어하기도 하고 머뭇거리기도 하고 진지하기도 했다. 분명한 건 그들 모두에게서 어떤 마음이 느껴졌다는 점이다. 무엇으로도 결코 훼손하거나 왜곡되거나 사라질 수 없는 마음.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연약하고 변하기 쉬우며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마음. 각자의 여행을 시작하게 했고 여전히 지니고 있으며 아마도 여행을 마칠 때는 이전과 같지 않을 마음.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믿으며 바라는 마음.                 p.128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가 어느새 쉰일곱 번째 작품이 되었다. 올해 첫 출간되는 작품은 문지혁 작가의 <나이트 트레인>이다. 이번 작품부터는 기존 6권, 4권 단위로 한 명의 표지 작가의 작품으로 묶이던 방식에서 벗어나 한 권 한 권이 한국 문학의 대표성을 가지는 것으로 새롭게 큐레이션된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표지 이미지부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 작품은 여행 에세이처럼 읽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1999년 6월, 3주 동안 유럽 10개 나라를 도는 패키지 여행을 떠난 대학생 '나'의 이야기를 2024년 9월의 소설가인 현재의 '나'가 서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런던으로 들어가서 파리로 나오는, 유럽을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빙 도는 여정에는 유독 야간열차를 타는 구간들이 많다. 브뤼셀/암스테르담, 뮌헨/퓌센, 빈, 베네치아, 로마, 인터라켄, 니스... 수간이 모두 야간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일정이다. 나는 그로부터 25년이 지나고 나서야 당시에 왜 유럽에 가려고 했던 것인지 생각해 본다. 주요 서사가 모두 날짜 별 여행기로 진행되고 있어 실제로 야간열차를 타고 유럽 여행을 다니는 듯한 기분으로 읽었다. 문지혁 작가의 작품들 대부분이 실제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지, 상상 속 허구의 이야기인지 궁금하게 만들어 주곤 했었는데, 이번 작품 역시 내밀한 고백을 들려주는 것처럼 진실과 허구의 경계 사이를 넘나들며 펼쳐진다. 삶이 소설이라면, 우리는 그 소설을 이루고 있는 등장인물들인 셈이고, 인생에 여행 아닌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매일 매순간 또한 여행에 관한 기록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작품은 여행하듯이, 설레이는 마음으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듯한 기분으로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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