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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가
김진영 지음 / 반타 / 2026년 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네 형이 다른 이유로 죽은 거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 네 형이 한이 아주 많아."
아버지가 여전히 형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형용은 느꼈다. 마흔네 살이던 아들이 여든이 넘은 자신보다 먼저, 그것도 예고 없는 죽음을 맞았다는 현실을 상조는 마치 악몽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에휴. 아버지, 형처럼 단정하게 잘 살다 간 사람이 어딨다고. 형이 무슨 한이 있겠어요." p.32~33
형용은 사내 인원 감축으로 인해 15년간 일하며 30대를 오롯이 바쳤던 직장에서 퇴사를 하게 된다. 대기업에서 희망퇴직 당하고 보니, 전세보증금 대출을 받아 이사한 아파트의 대출 이자와 두 아이의 학원비 생각에 머리가 아프고 막막하기만 하다. 그런데 마침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로부터 자신이 죽기 전에 미리 상속을 하겠다고 연락이 온다. 아버지가 우울증인것 같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아버지에게 가니, 엉뚱한 소리가 나온다. "네 형이 다른 이유로 죽은 거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 네 형이 한이 아주 많아." 형용은 마흔네 살이던 아들이 여든이 넘은 자신보다 먼저, 그것도 예고 없는 죽음을 맞았다는 현실을 아버지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목소리를 높이며 "네 형, 누가 죽인 거다!"라고 말을 이어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그 말을 주의깊게 듣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믿는 편이 큰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쉽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던 것이다. 이후 형용은 상속받은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죽은 형이 아내 몰래 사두었던 땅을 물려받아 아내와 함께 베이커리 카페를 차리기로 한다. 그렇게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부안으로 내려가 공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70년 넘게 주인이 아무도 쓰지 못하게 꽁꽁 묶어뒀던 땅을 왜 뒤집어 놓으냐고, 폐허로 남아 있던 땅에서 먹는장사를 하면 안 된다고, 땅을 오랫동안 지키고 있던 할매가 무당이었고, 그 땅에서 사람이 죽어 나갔다는 것이다. 형용은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기어코 카페를 오픈하고,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곧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상조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은 그 손을 내려다봤다.
"아버지, 나 좀 꺼내줘..."
땅속에서 형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표정한 얼굴이 어둠 속 흙 밑에서 떠오르는 듯했다.
"형진아!"
상조는 허겁지겁 무릎을 꿇고 맨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흙을 파낼수록 형진의 손은 더 깊이, 마치 수렁처럼 가라앉았다. p.164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적산가옥은 90여 년 전 당시 손꼽히는 부자였던 일본인이 주인이었다. 6.25 전쟁 때 집이 불타고 난 뒤로는 그대로 방치되다, 집주인이 집을 팔려고 했지만 죽고 만다. 그 뒤로는 귀신한테 산 사람이 잡아먹히는 곳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공포 훈련을 한다며 들어갔던 사람 중에 악몽에 시달리거나, 귀신 들려서 미쳐서 나온다는 소문도 있었다.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건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 그 자리에 굳이 카페를 만들고, 인생 재기를 꿈꾸며 형용과 아내 유화가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이유 없이 하루 만에 음식들이 상하는가 하면, 유화는 일본 전통 옷을 입은 하얀 얼굴의 남자가 증오와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자신에게 소리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대체 하얀 얼굴의 남자는 누구이며, 이 땅에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당이 있는 집>을 쓴 김진영 작가의 신작이다. 사람들의 욕망이 집착으로, 그 집착이 광기로 변해가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부동산과 상속, 토지 신앙과 일제강점기의 적산가옥이라는 소재를 통해 오싹한 공포 서사를 보여준다. 귀신과 저주라는 오컬트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땅을 사고, 물려주고, 나누고, 빼앗으려는 행위 속에 담긴 수많은 탐욕이 어떻게 차별과 폭력으로 연결되는지를 적나라게 하게 그리고 있어 K-오컬트 호러 소설로서 엄청난 흡입감을 선사한다. 작가는 '죽은 이의 육체는 사라져도 강한 정념은 이야기나 물건 혹은 건축물에 깃들어 남는다고', 이 작품은 바로 거기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산 자의 탐욕이 죽은 자의 제물이 되는 순간, 저주의 계보가 시작된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작가의 장점이 페이지마다 고스란히 담겼는데, 마치 눈 앞에 그려지는 듯한 시각적 체험이 이야기에 더 빠져들게 만들어 준다. 영상화 된다면 <파묘> 만큼이나 파격적인 작품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