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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 ㅣ ANGST
김인숙 지음 / 북다 / 2025년 1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 동네에서는 다 죽어.
그리고 다시 한마디 더.
그런데 너는 살았지.
그러면서 난데없이 모유리의 이마를 손으로 쓸었다. 이마로 내려와 있던 머리카락이 엄마 속에 달라붙었다. 그 부드럽던 손...... 그건, 그 와중에도 '엄마의 손'이었다. 미운 엄마, 엄마 같지도 않은 엄마, 못돼 처먹은 엄마...... 개 같은 엄마...... 쌍년 같은 엄마...... 그러나 엄마. p.106
세상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충격적인 일들이 수두룩하게, 또 그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더 수두룩하게 벌어진다. 매일같이 세상 어디에선가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이 작품 속 비극도 그렇다. 어느 해 여름, 쓰레기집에서 살던 쓰레기 노인이 사망했다. 도시 괴담 방송을 하는 유튜버가 집을 촬영하다가 무너진 폐가구와 쓰레기에 깔린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구급대와 경찰, 그리고 특수청소업체가 곧 현장에 출동했다. 사람들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엄청난 양의 쓰레기들로 인해 어디든 건드리는 순간 송두리째 무너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곳은 멀쩡하기만 하다면 대저택이라 불릴 만한 집이었다. 지어진 지 100년 가까이 된 집이었는데, 서구풍으로 공을 들인 석조 저택이라 요즘 집들보다 더 튼튼하게 보였다. 문제는 외벽이고 내벽이고 보이는 데가 없을 정도로, 쓰레기가 집을 아예 먹어버린 꼴이었다는 거다. 게다가 하필 날씨는 폭염이었다. 별별 날것과 벌레들이 날아 다녔고, 악취와 냄새도 지독했다. 시신을 구조하기 위해서라도 쓰레기들을 일부 치워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직 덜 죽은 사람이 한 명 발견된다. 마치 살아 있는 유골과도 같은 상태의 사람과 진짜 유골까지 나타난다. 단순 사고로 처리되었을 노인의 죽음은 그렇게 사건으로 전환된다. 도대체 이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자신도 깨닫지 못해서 자신에게조차 비밀이 된 말들. 그 뜨겁고 달콤하고, 그래서 심지어 쩔쩔매는 것 같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절절 끓는 철판 위에 볶이는 듯 안달 나 있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함부로였던 마음과 말들. 비밀은 결코 폐기 처리 되지 않는다. 쓰레기가 될망정 어딘가에 쟁여진다. 부패하고 냄새를 풍기고 벌레가 꼬일망정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걸 뒤지고, 찾아낸다. p.235~236
'공포'를 기반으로 한 장편소설의 새로운 전개를 선보이는 앙스트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은 박민정 작가의 <호수와 암실>이었고, 두 번째로 김인숙 작가의 <자작나무 숲>이 나왔다. 이후에 출간될 라인업에 손보미, 김혜진, 조예은 작가 등의 이름이 있어 매우 기대하고 있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은 2022년에 발표되었던 동명의 단편 소설을 확장하여 다시 쓴 장편소설이다. 단편에서 1인칭 시선으로 '그 집'과 할머니와 자신의 엄마를 응시했던 화자 '나'가 장편에서 '그 집'의 유일한 상속녀 '모유리'가 되고 이야기는 3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김인숙 작가는 '단편을 장편화하는 것이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호더 할머니와 사라진 아들, 나와 미혼모 엄마로 이름이 없던 인물들이 하나씩 이름을 가지면서 좀 더 분명하고 다채로운 서사를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래 전 김인숙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필사를 해가며 여러 번 곱씹었던 기억이 난다. 예리한 묘사들과 섬세한 문장들, 그리고 생의 이면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그 시선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을 정도로 좋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난 작품이 꽤 오랜만에 읽는 것인데, 여전히 마음을 휘젓는 서사에 완전히 몰입하며 읽었다.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해 그것들을 쌓아놓고, 주워온 것도 쌓아놓고, 그러다 보니 커다란 집이 쓰레기로 가득해졌고, 결국 그 속에서 죽어버린 노인의 서사에는 과거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왜 그렇게 살아야만 했는지, 누가 노인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인지... 노인의 죽음은 사고인지, 누군가의 의도인지... 쓰레기 더미 사이에 숨겨진 비밀들이 서서히 파헤쳐지면서 드러나는 진실이란 굉장한 무게로 다가온다. 쓰레기가 가득 덮고 있던 그것들, 그 아래 묻힌 것들을 다 꺼낸다면... 얼마나 많은 슬픔과 비밀이 드러날 것인가. 노인이 어떤 마음으로 그것들을 지켰는지, 그 거대한 서사가 압도적인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