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장소
나희덕 지음 / 달 / 2026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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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가 즐겨 앉던 벤치에는 사람 이름 대신 '케 세라 세라'라는 글자만 음각되어 있다. 마음이 무겁거나 우울할 때 그곳에 앉아 도리스 데이의 그 노래를 혼자 읊조리다보면, 마음 한끝에서 밝은 기운이 생겨나곤 했다. 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모든 잘될 거라고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같았다. 눈앞에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냥 흘러가라고, 괜찮다고,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놀랍지 않은가, 평범한 의자에 적힌 한 문장이 그런 위로를 베풀어준다는 것이.               p.14


나희덕 시인은 산책과 여행이 삶을 견디게 하는 두 가지라고 말한다. 몸이 움직이면 마음도 따라가며 풍경을 받아들이고, 그러다 마음의 장소를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른다고. 이 책은 바로 그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2017년에 나왔던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를 전체적으로 손보고 글을 보태어 나온 개정판이다. 글과 사진의 배치도 달라졌고, 표지도 아름다워져서 새책처럼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나희덕 시인의 시집만 만나온 터라, 이번 산문집을 아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시인은 한 해 동안 런던에서 즐겨 걸었던 템스 강변에 있는 벤치 등판에는 누군가를 기리는 문장들이 새겨져 있었고, 평범한 의자에 적힌 한 문장에 시인은 위로를 받는다. 보통 그 벤치에는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구를 기리기 위한 문장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시인이 즐겨앉던 벤치에는 사람 이름 대신 '케 세라 세라'라는 글자만 음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같은 기분에 자신이 죽은 뒤에 묘비 대신 벤치를 놓아달라고 자식들에게 말했을 정도로 인상깊은 장소였다. 또 영국 바스에 있는 생긴 지 삼백 년도 더 된 빵집에서 빵에 깃든 역사와 기억을 맛보았던 경험과 어제의 친구와 오늘의 친구가 만나 내일의 친구가 되었던 순간에 나누어 가진 스페인의 수제품가게에서 골라온 반지의 추억, 아일랜드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만난 책을 읽던 노인을 통해 떠올린 소설에 대한 이야기 등 시인이 만난 장소와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들디 딱 적당한 온도로 마음을 데워 주었다. 




누구에게나 특별한 마음의 장소라는 게 있다. 살면서 지치고 외로울 때 오래된 친구를 찾아가듯 몸과 마음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곳. 나에게도 그런 장소가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전남 강진에 있는 백운동 별서정원이다. 그곳과의 인연은 꽤 긴 편이다. 십여 년 전 지인의 안내로 월출산 아래 멋진 동백숲이 있는 집터를 가보게 되었다. 그 후로 낮은 돌담과 작은 오두막이 있는 그곳에 이따금 혼자 찾아가 앉아 있곤 했다. 집터를 구입할 사정은 안 되지만, 마음으로는 그곳에 수없이 집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했다.              p.190


영국과 미국, 프랑스, 튀르키예 등 해외 여러 도시들부터 한국의 회산 백련지, 전주 한옥마을, 전남 백운동 별서정원 등 곳곳의 글과 사진으로 만나면서 함께 그곳들을 걷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야말로 방구석에서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런던에 체류하는 동안 자주 들르던 자선가게에 있던 장애로 심하게 일그러진 손가락을 가진 남자, 사람이 살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된 집 정원에 있던 낡은 초록색 소파, 유럽의 벼룩시장에서 데려온 백 년이 넘은 괴종시계,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 있는 연인들이 사랑의 자물쇠를 걸어주는 다리, 세계에서 가장 큰 분화구를 지닌 포아스화산이 잘 보이는 공터에 둘러앉아 했던 시 낭독회 등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은 시인의 시선들이 우리를 그 각자의 순간 속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시적 언어로 재해석된 장면들은 하나하나가 색깔과 사연을 가지고 있어 짧은 이야기 속에도 그들만의 드라마가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손 뻗어 닿는 곳에 놓아두고 살면서 지치고 외로울 때마다 한번씩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책이었다. 사람은 걷고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찾아가는 자신만의 장소가 있을 것이다. 나희덕 시인이 걸으며 만난 그리운 장소들을 통해 각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장소'를 떠올리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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