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베첸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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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청중은 숨 죽이고 연주를 감상했다. 모두 숨이 멎은 듯 했다. 시선은 피아노에 고정한 채 영락없는 바보처럼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백 개의 손으로 연주한 듯하고 당장이라도 피아노가 터져버릴 것 같았던 그 폭발적인 코드 진행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말을 잇지 못했고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 그 믿기지 않는 정적 속에 노베첸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들었고 건반 너머로 쑥 내밀어 피아노 현에 가져다 댔다.             p.57~58


연극으로 상연되며 대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모놀로그 희곡으로 쓰였다. 이후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피아니스트의 전설>로 영화화되어 세계적으로 사랑받았다. 엔리오 모리코네의 음악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을 만큼 유명한 곡들도 많은 작품이다. 비채의 모던 앤 클래식 시리즈로는 2018년에 나왔는데, 지난 달에 영화가 재개봉을 하면서 지금은 영화 포스터 버전으로 책 커버가 바뀌었다. 


이 책은 소설처럼 읽히지만, 실제 연극을 위한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어 일반적인 소설의 구성과 약간 다르다. 저자는 책의 형태로 이 작품을 볼 때 '실제 공연과 큰소리로 읽어야 하는 소설의 중간쯤 되는 것 같다'고 서두에 밝히고 있다. 배에서 태어나 일생을 바다를 떠돌며 살았던 천재 피아니스트 '노베첸토'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국내에서도 1인극으로, 음악극으로 상연된 적이 있다. ‘모놀로그’답게 호흡은 짧고 전개는 빠르며 대화는 절제되었지만 독백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진정성 있게 보여준다. 무대에 선 배우는 선상의 쇼를 이끄는 진행자가 되어 화려한 입담을 펼치고, 이야기의 화자이자 트럼펫 연주자 ‘팀’이 되어 노베첸토의 삶을 서술하고, 노베첸토 자신으로 분하기도 한다. 무대극으로 봐도 정말 매력적인 작품일 것 같아 궁금해졌다. 언젠가 공연을 하게 되면 보러 가고 싶다. 




하지만 끝은 없었지. 당신이 보지 못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끝나는 곳이야. 세상의 끝/

피아노를 생각해봐. 건반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 우리 모두 그게 88개라는 걸 알지. 건반은 무한한 게 아니야. 당신, 당신은 무한하고 그 건반들 속에서 무한한 것은 당신이 만들어내는 음악이야. 건반은 88개이고 당신은 무한해. 난 이런 게 좋아. 사람은 무한하게 살 수 있지. 만약 자네가/              p.76


호화 유람선에서 버려진 아기가 자라면서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고,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피아니스트가 된다. 어린 시절 피아노 의자에 앉아 다리를 대롱거리면서 했던 첫 연주에 사람들이 모두 숨죽이고 바라보던 장면부터 그의 삶은 결정된 건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속임수도 없이 아름답다고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누군가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기도 했다. 그만큼 감동적이었던 연주였다. 그런데 그토록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그는 왜 배에서 내리지 않는 걸까. 천부적인 피아노 실력으로 떼돈을 벌고, 좋은 집도 사고, 뭐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움직이는 감옥에 갇혀 지내는 걸까. 왜 계속 바다를 오가며 사는 걸까. 


단 한 번도 육지를 밟은 적 없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노베첸토는 '존재한 적 없는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친다. 육지로 나아가 넓은 세상을 만나는 대신 꼭 2000명만큼의 세상을 접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만의 작은 세계 속에서 깊이 있게 살아간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이 지나온 시간과 감정을 건반 위로 옮긴다. '누군가의 눈 속에서, 누군가의 말 속에서, 실제로 그들이 느낀 공기를 들이마신 것처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는 사람들이 가진 흔적과 장소, 소리, 냄새, 그들의 땅, 그들의 이야기를 책처럼 읽어낼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의한다. '88개의 유한한 건반으로 무한한 음악을 연주하는 일'이라고. 단 91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문장으로 리듬을 만들고, 단어로 피아노 연주를 직조해내는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매 페이지마다 음악이 넘쳐 흐르는 것 같은 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를 감동적으로 봤다면, 영상이 미처 담지 못한 노베첸토의 다층적인 세계를 만나볼 수 있는 이 책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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