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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작별
김화진 외 지음 / 책깃 / 2025년 1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연선이가 싫지만 좋았다. 보기 싫었지만 보고 싶었다.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 애를 좋아했지만 좋아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연선이와는 늘 단둘이 있고 싶었다. 오후의 볕으로 몸을 덥히며 조금씩 잠들어 갔던 어릴 때처럼. 그러나 연선이와 함께 있으면 방해하는 것투성이였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빛, 나를 통과해서 곧장 연선이에게 도착하는 정제되지 않은 눈빛들... 나는 그것들을 목격하는 것이 힘들었다. 왜 힘들었는지, 알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 김화진, '우연한 작별' 중에서, p.24~25
진영은 오늘 죽은 아들 우현을 만나러 간다. 수많은 후기를 남김없이 읽고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심사숙고한 뒤 결정한 곳이었다. 우현은 특성화고 금형과로 가서 손으로 뭔가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싶어 했다. 도제 수업을 나가게 되면 주 2 3일은 일을 배우며 돈도 벌 수 있었는데, 그 돈들은 자연스럽게 생활비의 일부가 되었다. 우현이 사고를 당한 날, 늦게 일어난 우현은 배가 고프다고 했다. 그날따라 진영도 늦잠을 잤고, 밥을 챙겨줄 시간이 없었다. 결국 배고파하는 아이를 아무것도 챙겨 먹이지 못하고 보냈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VR 센터에서 언제로 돌아가고 싶느냐고 물었을 때, 진영은 사고날 아침이라고 대답했다. 일어난 사실을 바꿀 수 없다면, 밥이라도 먹여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진짜 김이 나는, 따뜻한 음식을 한보따리 만들어 VR 센터로 향했다. VR 헤드셋을 쓰자, 8년 전 그날 아침에 진영은 서 있었다. 아들 목소리에 둑이 터진 것처럼 눈물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상다리 부러지는 아침 식사를 차려 주고, 우현이 맛있게 먹고 출근을 하러 나가면 그들의 만남도 끝이었다. 다시 만나기 위해 8년을 기다렸는데, 환하게 웃는 우현의 모습을 보며 인사를 나눈다. 이제 재생된 가상 현실은 끝이 났다. 준비된 다음 서사도 없었다. 그런데, PD가 종료 버튼을 눌렀는데도, 기계가 먹통이 되었는지 꺼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다음 장면에서 진영은 우현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회사로 향하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일터로 향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진영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음 장면을 절대 보고 싶지 않으면서 동시에 반드시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거다. 그리고, 진영은 사고의 진상을 알게 되는데... 대체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시간 밖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언니, 있잖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뭘 좋아하느냐는 별로 중요한 것 같지가 않아. 다들 그렇게 말하잖아. 좋아하는 게 뭐냐고.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고. 근데 진짜 중요한 건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는 거거든. 근데 그게 안 되는 것 같아.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도록 두질 않는 것 같아.
누가?
내 물음에 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조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이 세상 전부가? - 최진영, '휴일' 중에서, p.109
지금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 여섯 명이 참여한 소설 앤솔러지이다. 김화진, 이꽃님, 이희영, 조우리, 최진영, 허진희 작가 모두 전작들을 인상깊게 읽었기에 매우 기대하며 만나보았다. 여섯 편의 이야기는 사랑과 폭력, 노동과 죽음, 기술과 교육 시스템, 사회적 무관심과 편견 등 한국 사회가 오래도록 앓아온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김화진 작가의 <우연한 작별>에선 동갑내기 친구이자 사촌이었던 두 사람이 십대 시절 내내 겪었던 애증과 폭력에 대해서, 조우리 작가의 <에버 어게인>에서는 현장 실습을 나간 고3 학생의 죽음을 통해 청소년 노동의 현재를 보여준다. VR 기술을 통해 죽은 아들의 마지막 아침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비밀이 가슴 먹먹했던 이야기였다. 그 외에도 현실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히 구현된 가상 체험을 통해 전쟁 시뮬레이션을 통과해야 하는 학생들의 이야기와 팬데믹과 기후 위기 이후 가상 세계인 메타버스가 일상이 되어 버린 가족의 이야기 등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살면서 우리는 누군가와, 한 시절과, 혹은 과거의 자신과 작별 인사를 건네고 다름 걸음을 내딛는다. 이 책 속에 수록된 작품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작별의 문턱을 지나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애틋하지만 단호하게, 다정하면서도 사려깊게 건네는 여섯 번의 작별 인사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