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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을 처방해드립니다
루스 윌슨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1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가 읽은 모든 것이 우리 두뇌의 아카이브에 차곡차곡 쌓인다는 것, 거기에 독서의 묘미가 있다. 나는 신기하게도 독서의 기억이 난데없이 수면 위로 올라와 임의의 현재 어느 순간과 연결되곤 한다. 제인 오스틴의 엘리자베스, 베넨 일가, 결혼 이야기를 읽다가 마거릿 드래블과 퍼넬러피 모티머리의 시공간으로 들어가는가 하면.. 문득 헨리 제임스의 이저벨 아처와 비교하게 되고, 그러다가 다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 인생의 희비고락을 반추하게 되더라. 읽고 있는 책의 논리적 맥락을 찾으려다가 이런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고 마는 것이 독서이다. p.104
평탄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삶이었다. 그런데 1992년 어느 맑은 겨울날, 그녀의 나이 예순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운전대 앞에 앉아 교통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순간, 갑작스러운 통증이 그녀를 덮쳐 온다. 이튿날 병원에서 그녀는 메니에르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난청, 메스꺼움, 어지럼증 같은 증상이 수반되는 병이라고 한다. 그날을 계기로 자신이 놓쳐버린 삶을 되찾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자신만의 정주할 공간, 자신만의 숨쉴 공기가 필요한 것은 모든 여성에게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인 루스 윌슨은 일흔 살에 한적한 시골에 자신만의 집을 마련한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 사랑해온 제인 오스틴의 전작 다시 읽기를 시작한다. 독서를 통해 자신의 지나온 삶을 복기하고, 헝클어진 마음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고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서다.
70세에 졸혼 선언, 시골집에 10년 칩거, 6권의 제인 오스틴 작품 다시 읽기, 88세에 박사학위, 90세에 책 출간이라니... 너무 근사하지 않은가. 1947년에 <오만과 편견>으로 제인 오스틴 소설에 입문했고, 평생 열렬한 독자로 살아왔던 그녀는 오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 오스틴의 모든 작품을 다시 읽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오만과 편견>, <노생거 수도원>, <이성과 감성>, <맨스필드 파크>, <애마>, <설득>에 이르기까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하나하나 읽어나간다. 오스틴 독자들한테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어 보면, 많이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각각의 작품이 비슷한 이유로, 또 다른 방식으로 매력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저자는 혼자만의 집에서 제인 오스틴을 다시 읽으며, 읽다가 떠오르는 사람들, 사건들 사이를 생각이 마음껏 헤매 다니도록 풀어놓는다. 그리고 이번에야 제대로 이해가 되는 부분과 통속 연애극을 재해석하는 오스틴의 비상한 관찰력을 고스란히 느낀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다시 읽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인 오스틴이 창조한 허구의 세계에는 빛과 그림자가 씨실과 날실로 직조되어 있다. 이것은 브레인 선생님이 말씀하신 모듈레이션과도 일맥상통한다. 미학적 개념이 현실 세계로 전이되고 기억과 텍스트가 상상의 조화를 이루는구나. 노년의 다시 읽기로 내 상상의 자원에는 새로운 차원과 새로운 기억이 더해졌다. 퀘스트 헤이븐의 암울한 기억, 어지럽던 도덕적 딜레마들, 일부는 잊히고 일부는 질기게 남아 있던 경험의 그림자들을 산산이 흩어뜨린 건 무대 위에서 맛본 행복한 기억의 찬란한 빛이었다. 독서의 마법이 내 영혼의 시름을 치유해주고 있었다. p.310~311
다시 읽기가 천성이라는 저자는 <오만과 편견>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따라가면 자신의 성장 과정이 추적될 정도라고 말한다. 시기가 바뀔 대마다 자신의 독서가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나와 내 주변의 부분들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소설을 읽고, 또 시간이 흐른 뒤 그걸 재독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열다섯 살에 <오만과 편견>을 처음 읽고 내 삶은 빛으로 환해졌다'는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 보았다. 나 역시 책을 읽으며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현실의 불합리함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적이 분명 있었으니 말이다. 그 시절 책 속의 주인공들이 내가 사는 세계보다 더 재미있고 활기찬 다른 세계로 나를 데려다 주리라고 기대했던 것이, 나만 그랬던 게 아니라는 사실 또한 위로가 되었다.
이 책은 가볍게 읽어 볼만한 독서 에세이라기보다, 제인 오스틴 작품 전권을 세심하게 분석하고 가이드해주는 안내서이자 책이 가진 힘과 독서의 역할을 전생애를 통해 보여주는 감동적인 회고록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그저 책을 좋아하는 90세 할머니가 아니라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이자 문학 교사이자 독서하는 부모이자 교육자였기 때문이다. 평생 책 읽기를 사랑해온 독자로서, 인생의 여러 단계에서 친구이자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내는 과정은 너무도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했다. 독서의 진짜 재미는 '다시 읽기'를 할 때 비로소 찾을 수 있다. 책을 새로 펼칠 때마다 텍스트의 접힌 모서리 안에서 지난 기억과 경험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독서의 가치를 이토록 로맨틱하고 설레이게 보여주는 책이 또 있을까.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많이 밑줄 긋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이고, 메모하며 읽었다. 이 책 덕분에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책을 한 권 읽을 예정이라면, 단연코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