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뜬구름
찬쉐 지음, 김태성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웃집의 컴컴한 창문에서 가벼운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얼굴이 뜨거워지면서 고개를 숙인 채 비틀비틀 걸어 나가며 걸음마다 떨어진 그 꽃들을 전부 밟아 버렸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도둑처럼 도망쳐 왔다. 쥐 한 마리가 그의 앞에서 죽을힘을 다해 하수구 안으로 도망쳤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거리로 내달렸다. 주의 두 눈이 여전히 그의 좁은 등 위에 멈춰 있었다. 「감시자였어.......」 그는 화를 내면서 욕을 퍼부었다.            p.11~12


향기를 가득 품은 닥나무의 새하얀 꽃이 빗물을 잔뜩 머금어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떨어진다. 겅산우는 밤비를 맞아 떨어진 꽃들이 여전히 탐욕스럽고 생기가 넘치는 모습을 보고는 화가 나서 그 꽃들을 전부 짓밟아 버린다. 그때 깜짝 놀란 여자의 비쩍 마른 얼굴이 이웃집 창살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웃집 여자 쉬루화이다. 그녀는 밤새 남편의 코 고는 소리와 옆집 침대의 뒤척이는 삐걱소리를 듣는다. 아침에 땅바닥에 흩어진 하얀꽃들을 보다 옆집 남자를 발견한 그날 저녁, 남의 사생활을 엿보지 말라는 작은 종이 쪽지를 받는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며, 누군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스스로를 방어하고, 주위를 경계하며, 끊임없이 서로를 감시하는 기묘한 이들의 관계는 삶의 부조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문에 〈쇠꼬챙이를 박〉아 자신을 방어하고 〈나무에 거울을 매달아〉 옆집을 감시하는 모습이 결코 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신경쇠약 직전의 불안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그들의 의심과 방어가 그럴듯 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고 일어나서도 뭔가 개운하지 않은 악몽같은 느낌과 좋은 향기도 너무 강하면 머리가 아픈 것처럼 꽃이 풍기는 향기에 취할 것 같은 분위기도 이 작품에 몰입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어 준다. 찬쉐의 문장들은 특히 이미지 묘사가 매우 섬세하고 리얼하다. 감각들을 일깨워주고, 오감을 자극하는 듯한 문장들을 따라 가다보면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풍경이 손에 만져질 듯한 생생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아름다운 것을 추하게 그리는 동시에 추한 것을 미적 대상으로 삼는 특유의 시선이 공감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찬쉐의 실험적 글쓰기가 이끌어 가는 대로 몸을 맡긴 채 이 이야기가 도달하는 그 곳까지 가보자. 




그녀는 실 담요를 몸에 걸치고 집 안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실 담요가 허공에 날리면서 휙휙 분노의 소리를 냈다. 천장에 달라붙어 있던 나방이 놀라서 날다가 또 담요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져서는 서서히 죽어 가며 몸부림을 쳤다. 숨을 헐떡거리며 멈춰 선 그녀는 옷장 거울에 비친 잔뜩 짓무른 무수한 혀를 보았다. 그녀는 창문 유리에 비친 희미한 석양빛이 두려웠다. 그 누르스름한 빛 한 줄기가 그녀의 눈을 너무나 아프게 찔러 댔다. 그녀는 짙은색 담요로 유리를 덮었지만 여전히 별처럼 흩어진 광점들을 다 막지는 못했다.            p.138~139


매년 노벨 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해외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중국 여성 작가인 찬쉐의 초기작인 이 작품은 2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결코 수월하게 읽히지 않는다. 주로 〈그〉와 〈그녀〉로 지칭되는 인물 간 구별이 어렵고, 벌어지는 일들 또한 시간과 순서가 모호하며, 사람과 사람, 진실과 허상의 경계가 흐릿하기 때문이다. 뜬구름처럼 분명히 실체가 보이지만 막상 손을 내밀어 보면 흩어져 버려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찬쉐의 작품은 <신세기 사랑 이야기>와 <격정세계>만 읽어 보았다. <신세기 사랑 이야기>는 언뜻 남녀의 욕망을 표면화시켜 보여주는 듯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으로 점점 들어가 심연에 도달하는 깊이 있는 전개를 선보이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의 매력이 있었다. <격정세계>는 책과 독서를 중심 소재로 하는 만큼 좀 더 현실적이고, 서사가 분명해 조금 수월하게 읽었다. 


<오래된 뜬구름>은 읽었던 작품 중에 분량이 작은데도 불구하고 읽기엔 가장 독특한 독서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인 것 같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실험적이고 강렬한 작품이라는 말처럼 낯선 감각을 일깨워주는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시적인 언어로 펼쳐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찬쉐 고유의 개성과 독보적인 색채가 아주 짙게 밴, 찬쉐 문학 세계의 초석이 된 작품이므로 꼭 한번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찬쉐의 작품들은 철학적 사유와 난해하면서도 섬세한 묘사, 거침없고 호방하게 뻗어나가는 상상력, 찬쉐의 대체불가능한 스타일, 음란하고 기이한 이야기의 세계, 마술 같은 세계로 빨려드는 환상 스토리 등으로 설명된다. 가독성과는 별개로 대체불가능한 스타일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