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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양장 특별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랑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겨ㄹ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사랑을 이룬 이들은 어쨌든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스무 살의 나는 생각했었다. p.16~17
이 작품을 17년 전에 초판으로 읽었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그림을 사용했던 표지도 아직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런데 좀처럼 내용은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이번에 개정판으로 다시 읽다 보니 문장들은 고스란히 기억이 났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상상해주는 거라고,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가는 거라고.... 아마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이해되지 않았을, 혹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을 문장들을 꽤 긴 시간만큼의 삶을 살아낸 뒤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다. 왜 작가가 사랑은 오해라고 했는데, 왜 사랑은 상상력이 될 수밖에 없는지 이제 나는 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읽었던 이 작품을 다시 처음부터 읽으며 새로운 작품을 만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파반느>의 개봉을 앞두고, 양장 특별판으로 나온 이번 개정판에는 소설 속 ‘나’와 ‘그녀’, 요한의 17년 후 이야기를 더해 더욱 특별하다. 라이터스 컷(Writer’s cut)이라니... 정말 설레이는 장치다. 영화로 치자면 일종의 디렉터스 컷과 같은데, 독자들이 본 내용의 결말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두려는 작가의 특별한 기획이라고 한다. 또한 이 소설만을 위한 BGM 음반을 제작하여 QR 코드로 수록했다. 머쉬룸 밴드의 음악 네가지 트랙을 들어볼 수 있다. 음악과 함께 소설을 읽으면, 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색다른 읽기 경험이 될 것이다. 영화는 캐스팅 소식 외에 스틸컷이라든가 아직 더 알려진 정보가 없어서 매우 궁금하다. 소설의 분위기를 어떻게 살릴지, 영상화된 버전에서는 어떤 것들이 달라질지도 기대가 된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현재의 내 삶이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다. 어렴풋이 의식이 돌아오던 때의 느낌이 떠오르고... 희미하게나마 시력을 회복하던 때의 감각도 떠오른다. 그 모두가 기적이라고 의사나 간호사들은 얘기했었다. 실은 어떤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파반느>로서의 나의 여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비록 느리고 장엄해도 누군가를 사랑한 삶은 기적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p.379~380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1899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벨라스케스의 <스페인 왕녀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초상>을 보고 싶은 영감을 받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피아노 연주곡을 만들었다. 이 소설의 제목은 거기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작가는 같은 화가의 또 다른 작품 <시녀들> 속 마르가리타 왕녀 곁에 선 키 작은 시녀의 모습에서 다시 영감을 이어받아 이 소설을 썼다. 죽은 ‘왕녀’ 곁에 선 ‘시녀’가 상징하는 것은 비단 주인공의 못생긴 연인만이 아니라 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뻐지고 싶고, 부유해지고 싶었던 지나간 우리의 모습들, 촌스럽고 시시했던 그 모든 시절의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은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하도록 태어났다. 하지만 그건 너무 불공평한 시합이다. 외모에 관한 한, 누구도 자신을 방어하거나 지킬 수 없으니까. 첫눈에 누군가의 노예가 되고, 첫인상으로 대부분의 시합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니,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조건이라면 너무도 불공평하다. 그리고 그 불공평함은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특히나 가혹하다. 작가는 '늘 스펙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경쟁력 없이 살 수밖에 없는 대다수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다고, 삼미 슈퍼스타즈가 남자들을 위한 소설이었다면, 이번 소설은 여자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평범한 인간관계가 어려울 정도로 못생긴 여자와, 잘생기고 번듯하지만 부모에게 버림받은 트라우마를 공유한 두 명의 청년의 우정과 사랑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외모 경쟁에서 불리한 여성들, 나아가 늘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여성들을 위한 일종의 연서이기도 하다. 긴 세월 동안 사랑받아온 작품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책의 초판은 무려 65쇄가 발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작품을 만나보지 않았다면, 바로 지금이 그 기회다. 아름다움의 바깥에서 시작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지금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