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푸른 사과처럼 무사해 교유서가 시집 1
소후에 지음 / 교유서가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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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댔다. 하얀 속살 같은 것도 둥근 씨방 같은 것도 없이 썩을 사람. 잠에 곯아떨어진 남자의 머리맡에서 여자는 왜 나를 속였어, 너는 다 거짓이야. 낮고 스산하게 말하며 사과씨를 투, 투 뱉어댔다. 남자의 볼따구니에 붙은 사과씨들이 꿈틀댔다.              - '나로 말할 것 같은 사과' 중에서, p.60


교유서가에서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소후에 시인의 첫 시집 <우주는 푸른 사과처럼 무사해>를 받았는데, 책이 너무 예뻐서 원성은 시인의 <비극의 재료>도 바로 구매해 버렸다. 시인이 직접 찍은 사진이 담긴 폴라로이드 북마크도 받을 수 있는데, 시집과 너무 잘 어울리는 북마크라 좋았다. 심플한 듯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표지 이미지도 마음에 들었지만, 더 좋은 건 내지에 표지 색과 같은 컬러의 그라데이션을 준 부분이다. 밑줄 긋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이며 들고 다니면서 계속 읽고 싶은 예쁜 시집이다.


'타원의 밤'은 일상과 환상의 경계가 미묘하게 걸처져 있어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온갖 빚으로 가득한 퍽퍽한 일상 속에서, 아무때나 일기를 쓰고 메개 밑에 숨기고, 또 몰래 해진 일기장을 또다시 들추며, 다리가 흔들리는 밥상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 하루를 보여준다. 하지만 시의 후반부에 이르면 '우주가 창을 열면 눈이 시릴지도 모른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요즘 빠져 있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지긋지긋한 가정 속에서 슬픔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두운 밤이 깊도록 부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게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 속 희망처럼 느껴졌다.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으며 풍경을 묘사한 시 '비도덕적 거울'도 마음에 남았다. '책이 거울이었다면 반복해서 읽었을까', 삶을 놓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삶을 놓고 싶다는 말로 오독했다', 는 문장들과 다리를 절뚝이며 열차 안으로 들어와 사람들에게 종이를 한 장씩 올려놓는 남자를 끔찍한 것을 본 것마냥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현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무심히 책장을 넘기는 내 눈에 일그러진 남자의 표정이 계속 남았던 것은 언젠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 본 적이 있지 않았을까. 




땅에 떨어진 식빵 위로/구름이 지나가고 있다//

슬리퍼 밖으로 삐져나온 발가락처럼/철거 예정인 주택 골목 안에 덩그러니 놓인//

누구 없어요?/누가 있었더라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오래도록 머물 수 없었던 마음들은/텅 빈 제집 담벼락에 스프레이로/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겨두었다                  - '희고 말랑한 문' 중에서, p.131


이 시집에 수록된 마흔다섯 편의 시들은 ‘문 NO.365’에서 ‘문 NO.12', ‘문 NO.24', 그리고 '문 NO.∞’로 끝이 난다. 우리가 살아 가는 일년 사계절의 시간처럼 보이는 365에서 시작해 점점 줄어들어다가 결국 무한대 기호로 마무리가 된다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문학평론가의 해설도 있고, 시인의 집필의도도 있겠지만, 결국 시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시를 읽는 이의 마음에 달린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면 문을 열고 우주로 향하는 무한대의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상적 시간들이 시의 단어와 문장들 속에 담겨 있지만, 시공간을 조금 더 넓혀 본다면 우리의 사고를 무한한 우주로 확장해도 좋지 않을까. 


정제된 단어와 은유로 빚어낸 함축적인 문장들이 시라면, 그 사이의 행간에서 끊임없이 무언가 자라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풍성한 시간을 선사해준 시집이었다. 시집 읽기의 가장 좋은 점은 뭐랄까, 마음껏 오독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소리내어 읽는 것만으로 느껴지는 언어의 리듬도 좋고, 분명 일상 속에서 마주할 법한 풍경인데도 시인의 언어로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는 듯한 느낌도 참 좋다. 이 시집의 제목에 '우주'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어서 시들을 읽기도 전부터 마음에 들었는데, 우주란 그 무엇에도 비유할 수 있고, 그 어떤 것도 은유할 수 있는 거대하고도 무한한 존재이니 말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한 뼘 남짓한 우주를 가지고 있다. 그 존재를 어떻게 키우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푸른 사과처럼 무사한 세계에서, 불안정하더라도 단단한 마음으로, 닫힌 문에 귀를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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