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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안녕
김효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날 두 사람은 제일 비싼 수박을 사 들고 신이 나서 집으로 향했다. 소우의 3평짜리 작은 자취방에 쪼그리고 앉아 수박 위에서 작게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이제부터 매년 생일에는 수박을 먹자고 약속했다.
"여름에 태어난 특혜야. 특혜."
리호를 만난 이후 소우의 삶엔 특혜가 많이 생겼다. 별거 아닌 것들이 둘만의 문화가 되고 금세 서로의 취향이 되었다. p.68
리호는 7년을 만난 남자친구 소우가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의 죽음은 리오에게 온 세상의 배신이자 버림이었다. 함께 할 미래를 꿈꾸며 캐나다에서 열심히 일했던 리호는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소우가 살았던 속초에 작은 집을 얻고, 함께 살기 위해 벌었던 모든 돈을 다 쓰기로 하고 술에 취해 지내며 삶을 돌보지 않는다. 그리고 소우의 첫 번째 기일날, 밤 9시에 전화가 걸려온다. 분명 소우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전화기 속 소우는 리호를 알지 못했다. 그의 정체는 평행우주 속에서 1년 전 시간대를 살아가는 '임소우'였다. 좋아하는 것도, 아이스 초코를 아이스 핫초코라고 말하는 것도 모두 같았지만 그에게는 여자친구가 없었다.
같은 꿈을 꾸던 소우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소우이면서 소우가 아닌 존재가 다른 세계로부터 나타난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30대가 되면 해수욕장 앞에서 살자던 소우의 꿈은 스물아홉에 멈춰 버렸다. 그와 함께 살면서 작은 애견 미용숍을 여는 것이 꿈이었던 리호의 마음도 거기서 멈춰 버렸다. 그런데, 자신이 없는 사이에 없는 사이 좋아하던 여름밤 천문대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해버린 소우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물론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소우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매일 밤 통화를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전화기 속 '임소우'는 현실 속 '소우'와 같은 점도, 다른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가 밝히지 않았던 가족 관계나 사람들과의 관계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리호는 점점 그가 낯설게 느껴진다. 몰랐던 친형이 교도소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없는 줄 알았던 가족들의 존재도 알게 되며, 사진관에서 일하며 카메라를 배운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여름밤 천문대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사라진 천문대 해설사와 특별한 관계였다는 정황까지 듣게 되자 리호는 충격에 휩싸인다.

그래, 우아함은 돈이구나. 돈에서 벗어나야 우리는 우아해질 수 있어, 소우야. 그 말이 소우를 질리게 했을까. 별을 좋아하는 남자친구는 리호를 배신하고 먼 우주를 향해 제 발로 뛰어내렸다. 어쩌면 그 배신감이 소우를 잃었다는 슬픔보다 더 컸을지도 모른다. '우리'라는 단어에 유일하게 이질감이 들지 않았던 리호의 가장 가까운 사람, 리호의 진짜 모습에 가장 가깝던 사람은 사실 죄다 거짓말이었고 사과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p.83
이 책을 읽으면서 죽어버린 전 남자친구의 다른 우주 버전이 나타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당황스럽겠지만, 그래도 반갑지 않을까. 내가 몰랐던 그의 다른 부분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어쩐지 무섭고 슬프기도 할 것 같다. 이 작품은 이렇게 어쩐지 아련한 분위기의 타임슬립 로맨스로 가다가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꾼다. 소우가 천문대에서 스스로 뛰어 내려 생을 마감했다고 들었는데, 그의 집에 찾아가 짐을 정리하다보니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다. 그렇다면 소우는 왜 죽은 걸까. 설마 누가 소우를 죽였다는 걸까. 리호는 다른 세계의 '임소우'와 정보를 주고 받으며, 현실 세계의 '소우'가 왜 죽은 건지 그 이유를 찾아내기 시작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평행 우주 속 '임소우'와 함께 현실 속 '소우'가 죽은 이유를 밝혀낸다는 설정이 흥미로운 이 작품은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안녕'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준다.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 나가야 하는 존재들에게, 제대로 된 인사 없이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된 이별 앞에서 무너지는 이들에게 작가는 다시 내일을 기다릴 수 있도록 다정한 위로를 건넨다. 극중 리호가 매일같이 가는 술집의 마스터는 갈 때마다 내는 돈에 비해 과한 음식들을 주었다. 그리고 어느날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사는 건 좋은 거야. 죽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살 수만 있으면 살아야 하는 거야. 매일 맛있는 걸 주면 안 죽을까 해서 나 매일 노력했다.” 라고. 덕분에 리호가 그 순간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셈이다. 생일 케이크 대신 수박을 나눠 먹고, 별과 은하수처럼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연인들의 모습이 슬프게만 그려져 있지 않아 더 좋았던 작품이다. 그래서 에필로그 속 마지막 장면을 기분 좋은 여운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