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정원 - 2025 제19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주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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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로운 인생이란 달리 말하면 '진정한 인생'이 아닐까? 중년을 통과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작'이라는 허들과 만나게 되기 마련이다. '고작해야 이거였나? 이게 내 인생의 전부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절망 어린 축소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때 고개를 드는 것이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진짜 인생이 있을 거라는 희망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 한 조각조차 없다면 현재는 과거에서 넘어온 의무를 해치우는 부역으로 전락하고 만다.               - 김성중 '새로운 남편' 중에서, p.49~50


혜숙은 청소 일을 하는 예순 살 여성이다. 소설가인 딸과 둘이 살고 있는 그녀의 일상은 매우 단순하다. 오피스텔에 가서 청소하고 집에 와서 씻고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다가 잠을 잔다. 볕이 따뜻한 오후에는 텅 빈 정원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커다란 기쁨도, 엄청난 슬픔도 없고, 웬만한 일은 그냥 참으면 되므로 분노를 표출할 일도 없다. 출근할 때는 간단한 도시락을 싸는데, 반찬이 뭐든 불평 없이 먹기 대문에 대단한 걸 싸진 않는다. 퇴근길에 친한 언니를 마주치는데, 집에 와서 밥 먹고 가라는 말에 다른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다음에 가겠다며 거절하고는 집으로 향한다. 네 시 조금 넘어 집에 도착하면 캠핑 의자에 앉아서 풍경을 바라본다. 겨울 정원엔 언 배추 몇 포기가 있다. 요즘은 이렇게 잔잔한 물결처럼 천천히 흘러가는 서사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것 같다. 소소하고,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 일상 속에서, 특별한 의미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속에 슬픔과 행복, 그리움과 회한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 


극중 딸이 엄마에게 "엄마는 단순한 게 아니라 성실한 거였어. 단순함이라는 개념에 성실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이거야말로 진짜 어려운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뭉클해졌다. 혜숙은 딸이 추천한 큰글자도서 모임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의류 부자재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부인과는 사별했으며 딸이 둘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을 알게 된 후 혜숙은 자신의 시간이 조금 다르게 흐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소박한 그 연애는 남자의 딸들이 찾아오면서 끝나 버린다. 무례한 그의 두 딸을 이해했기에, 남자에게는 말하지 않고 그냥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조금 울었고, 슬펐지만 이별 또한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잊혀져 간다. 저자는 수상 소감에서 혜숙에 대해 '너무 많이 슬퍼 본 적이 있기에 많이 슬프지 않고 조금 슬픈 것을 다행이라 여기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런 사람의 작은 기쁨과 슬픔, 그리고 그보다 큰 그리움에 대해 생각하며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아마도 세상의 많은 딸들이 자신의 엄마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드라마틱한 서사 없이도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어떤 경우든 저는 그 현실에서 제 마음의 빛을 찾아냈어요. 거기에는 분명 두려움이 있었죠. 하지만 두려움만 있는 건 아니었어요. 거기가 바로 견고한 현실에서 꿈이 나누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에요. 그러면 조금 뒤의 세계에서 빛이 흘러들어오지요. 그럴 때 저는 앞에 붙은 행선지만 보고 버스에 올라탄 승객과 같아요. 버스는 제 예상대로 갈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요. 승객은 경로를 결정할 수 없어요. 그건 운전사의 몫이니까요. 승객은 목적지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어떤 순간에도 저는 목적지를 잊어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았어요.              - 김연수, '조금 뒤의 세계' 중에서, p.103


올해로 19회를 맞이한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이십여 개의 문예지에 실린 256편의 작품 중에 예심에서 올라온 8편과 심사위원 네 명이 각자 두 편의 추천작을 선정해 본심에 올렸다. 이 책에 수록된 것은 그렇게 무려 16편의 소설을 두고 토론해 선정된 작품들이다. 기존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들은 수상작의 분위기에 맞는 표지 이미지였다면, 이번에는 파격적으로 수상작과 수상 후보작의 제목과 작가명으로만 채웠다. 그만큼 이 작품들간의 치열한 논의 과정이 있었다는 뜻인 것 같아 수상 후보작인 김성중의 「새로운 남편」, 김연수 「조금 뒤의 세계」, 서장원의 「히데오」, 임선우의 「사랑 접인 병원」, 최예솔 「그동안의 정의」 등 다섯 편의 작품도 매우 기대가 되었다.


수상작인 <겨울정원>을 비롯해서 수상 후보작까지 여섯 편의 작품이 고루 수준이 높아 인상깊게 읽었다. 오랜 만에 만나는 김연수 작가님의 신작은 반가운 마음으로 제일 먼저 읽었는데, 여전히 너무 좋았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성이 '조금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게 된다고 말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는데, 현실과 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여성은 소설가인 화자가 처음으로 쓴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이었는데,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과거와 그녀의 과거가 현재와 교차 진행되며 입체적인 세계가 만들어 진다. 모두가 끔찍하다고 말해도 그 속에서 다른 걸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이 하는 일이라고, 꿈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꿈의 내용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김연수 작가님의 장편소설 신작도 빨리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소설 보다> 시리즈로 만났던 서장원 작가님의 작품도 있었고, <하다 앤솔러지>에서 사랑스러운 유령 개 이야기가 참 좋았던 임선우 작가님의 작품도 기대하며 읽었다. 인공지능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남편'이라는 존재가 등장하는 김성중 작가님의 작품도 재미있었다. 이 책을 통해 '단순한 일상에 깃들어 있는 삶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느껴보고, '우리가 잊고 있던 감정들을 다시 떠올려보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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