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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사
이소영 지음 / 래빗홀 / 2025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키쇼는 재만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런 신성한 영역은 네팔인이 아니라면 알 수 없다. 그래서 속으로만 생각했다. '신이 몸속으로 들어와 말하면, 그 말을 다시 네팔어로 통역해 주는 거죠. 사람과 신을 연결하는 중간자라고 해야 할까요. 당신 같은 이방인 계급들은 모를 테지요. 영원히.' 키쇼는 치욕스럽고 더러운 노동 중에도 우아한 정신을 지켰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이 세계에서 무방비로 꽂히는 모욕을 견딜 수 있었다. p.172
최근에 뉴스에서 네팔의 2세 소녀가 살아있는 여신인 쿠마리로 선출되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쿠마리는 힌두교와 불교 신자 모두에게 숭배받는 존재로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될 수 있었고, 첫 월경이 시작되면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다시 사람이 된다. 사람보다 신의 수가 많은 네팔에서 현존하는 여신으로 살다가 현재는 평범한 사람이 된 한 여성이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다면 어떨까. 어느 늦은 밤, 피 묻은 속옷 차림의 여자가 맨발로 파출소로 뛰어 들어온다. 그녀의 몰골에 순경은 얼빠진 표정이 된다. 여자는 미친 듯이 말을 쏟아 내지만, 어느 나라 말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한국에 결혼이주여성으로 온 네팔 여성 차미바트는 왜 내연남과 그의 동거인을 무참히 살해한 것일까.
이야기는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법정 통역을 하게 된 통역사 도화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문제는 도화가 의뢰 받은 것이 '허위 통역'이었다는 거다. 개인 파산으로 인해 수술 수 약값을 마련하기도 어려웠던 도화는 대략 스무 마디만 허위 통역해주면, 1억 원을 대가로 주겠다는 제안을 받아 들이게 된다. 개인파산 상태에다 최근에 수술을 해 약값도 필요했고, 법정 통역사 일은 드문드문 들어와 마트 알바로 투잡까지 뛰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고인의 변호사라는 의뢰인 말로는 피고인에게 심각한 분열증이 있다고 했다. 마땅히 두 사람을 칼로 난도질했기에 법정 최고형이 나와야 할 사건이 정신병으로 감형된다면 안되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증거, 현장 검증, 자백 다 해놓고 이제와서 말을 오락가락하는 피고인이 정상처럼 보이도록 허위 통역해달라는 거였다. 하지만 살인 사건의 1차 공판이 마무리된 후 도화는 이 사건에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거 네팔에서 '정의로운 쌍년'이라 불리던 도화는 과연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까.

"나에게는 여러 말이 들릴 때가 있었어요. 옳은 말, 멋진 말, 틀린 말, 쓰레기 같은 말, 멍청한 말...... 그때 나는 옳은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들었어야 했던 말은 '바다가 보고 싶어요.' 그거였어. 텔레비전에서 당신 말을 들었어요. 바다가 보고 싶다는 그 말. 이번에는 그 말을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그게 답니다."
차미바트는 마치 도화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처럼 바라봤다.
"내 말을 통역해줄 수 있어요? 당신이 해야 해요." p.264~265
주인공 도화는 보라색 쇼트커트를 한 상태로 첫 장면에 등장한다. 그리고 차미바트는 도화를 만난 첫 날 '보라색 나비를 끝까지 쫓아가야 해'라고 말한다. 무슨 소리일까. 오피스텔로 돌아온 도화는 6개월 전 병원 추천으로 여성 갑상선암 환우들의 정서 안정과 심리 치료를 지원해주는 무료 상담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당시 도화는 스케치북에 다양한 크기와 색의 나비를 잔뜩 그린 적이 있었다. 엑스레이를 보니 갑상선이 딱 나비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담 내용은 비밀이었고, 상담사와 차미바트가 서로 알 리는 없었다. 안다고 해도 한국말을 모르니 소통이 될 리가 없다. 그리고 도화는 사건을 추적해 가는 과정에서 보라색 나비를 또 발견한다. '보라나비연대'라는 이름의 갑상선암 여성 지원 센터였다. "왜 하필 나비가 보라색이죠?" "멍들면 보랏빛이 되잖아요. 잠시 멍든 거지, 망가진 건 아니라는 의미예요." 도화는 점점 더 보라색 나비에 대해 말했던 차미바트에 대해 궁금해진다.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더 거대한 음모의 한복판으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이 작품은 <옥수역 귀신>, <아파트>, <여고괴담3> 등의 영화 시나리오를 쓴 이소영 작가의 세 번째 작품이다. 소설 이전에 시나리오로 먼저 완성되었고, 현재 영화화가 진행되고 있다. 법정 통역사라는 직업도 흥미로웠고 네팔의 독특한 문화가 만들어내는 이국적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결혼이주여성, 이주노동자, 원전 폐기물 등 현대 사회의 문제들과 함께 풀어내는 서사도 탄탄해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작품이었다. 읽는 내내 영상화된 버전의 장면들이 상상이 될 정도로 생생한 캐릭터가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했다. '진짜 듣는다는 건 뭐지?'라는 화두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도화라는 캐릭터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만큼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대책없는 정의감이 매력적인 인물이 탄생한 것 같다. 도화 역을 영화 속에서 누가 맡게 될지도 궁금해진다. 네팔의 언어와 종교, 문화라는 이국적인 요소가 잘 어우러져 독보적인 사회 고발 미스터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