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또 다른 실종자
질리언 매캘리스터 지음, 이경 옮김 / 반타 / 2025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줄리아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혼자 서 있었다. 그제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무게감이 갑자기 밀어닥쳤다. 마치 지옥으로 통하는 문을 연 것 같았다. 그녀는 팔꿈치를 조리대에 기대고 심호흡을 했다. 하느님 맙소사. 그녀는 이런 일을 겪을 만큼 잘못 살아오지 않았다. 삶의 모든 고비마다 그녀는 좋은 엄마와 좋은 경찰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말 그랬다. 하지만 오늘은 그 두 가지 역할이 서로 부딪혔다. p.103
스물두 살의 여성이 늦은 시각에 하우스메이트에게 와달라는 문자를 보낸 뒤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CCTV에서 번화가에서 한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문제는 그곳이 막다른 골목이었다는 거다. 그녀는 그 골목으로 사라진 다음 다시 나오지 않았고, 골목의 끝은 문도, 접근 가능한 창문도 없는 아파트 벽면이었다. 목격자도, 단서도 없었다. 남은 것은 더 이상 업데이트되지 않는 소셜 미디어 계정뿐. 대체 그녀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지난 해에도 비슷한 실종 사건이 있었다. 그 여성 역시 CCTV에서 목격된 것이 마지막이었고, 현재까지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한편 사건을 맡은 줄리아 경감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협박을 받는다. 그가 요구한 것은 두 가지다. 실종된 여자의 집에 거짓된 증거물을 몰래 놔두고, 그것을 토대로 가짜 범인을 살인 용의자로 체포하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라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줄리아는 생각한다. 자신은 부패한 경찰이 아니기 때문에 협박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분명히 말한다. 하지만 남자는 줄리아의 딸 제너비브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었다. 딸을 위해 줄리아가 무슨 일을 했는지도 말이다. 만약 줄리아가 남자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딸의 비밀을 온세상에 폭로해 버릴 것이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이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부패 경찰이 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신념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딸이 철창 신세를 지게 할 수는 없었다. 자신 또한 딸의 비밀을 은폐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 버리게 될 거였다. 과연 줄리아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딸을 무사히 지키고, 실종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야기는 여러 인물들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되며 차근차근 서사를 쌓아 나가다 놀라운 반전으로 예상을 뛰어넘는 결말에 다가선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불법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금지된 선을 넘을 만큼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선을 넘었다. 하지만 그녀는 우주를 향해 손을 뻗어서 세이디를, 그녀를 죽인 살인자를, 루이스를 위한 해답을 찾고 마음을 치유해야만 했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이 충동이 그녀를 관통했다. 루이스가 그녀에게 어떤 짓을 했든 간에, 그녀가 어떤 곤경에 빠져 있든 간에 이것이 그녀의 직업이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윤리관이나 가족, 그녀 자신이 위태로워지더라도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p.383
<잘못된 장소 잘못된 시간>이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질리언 매캘리스터의 신작이다. 전작에서 아들의 범죄를 막아야 한다는 엄마의 간절한 열망이 만들어 내는 타임슬립 서사와 놀라운 반전의 매력을 보여줬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연쇄 실종 사건을 배경으로 딸을 지켜야 하는 형사, 사라진 딸을 찾는 아버지, 범인으로 몰린 아들을 둔 어머니의 시점으로 제각기 다른 상황에서 각자의 자식을 지켜내기 위한 세 부모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시종일관 작가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무슨 일까지 할 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겠느냐고. 범죄 스릴러로서의 서스펜스와 반전의 재미도 있는 작품이지만, 부모와 자식, 정의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주제에 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 더 흥미로웠다. 전작이 타임슬립이라는 SF적 요소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최신 기술을 활용한 범죄 사건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가족이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존재이고, 거의 무조건 믿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 주어야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만약 자식을 지키는 일이 내가 살아온 도덕적 가치관을 포기해야 하는 거라면? 내 자식이 범죄를 저질렀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믿음과 의심 사이를 오가며 자식을 믿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까. 자식의 치명적인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증거를 조작해 가짜 범인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부모란 존재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말, 무슨 짓이라고 할 용의가 있는 존재이니 말이다.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하며 서사를 쌓아 나가는 방식은 많이 있었지만, 이 작품은 보다 촘촘하게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범인으로 몰린 아들을 의심하는 어머니와 사라진 딸을 찾는 아버지의 시점은 일인칭과 이인칭 시점을 오가고,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은 3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실종된 여성의 서사는 그 동안 활동했던 소셜 미디어 계정의 게시물로 보여진다. 자연스럽게 독자들은 그 시점들을 바쁘게 쫓아가며 의심과 추측을 오간다. 덕분에 지루할 틈 없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몰입해서 읽게 된다. 정교한 플롯과 탄탄한 구성, 그리고 반전까지 갖춘 스릴러로서의 장점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질리언 매캘리스터의 진짜 장점은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인물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곧 TV 시리즈로도 만들어진다고 하니, 영상화된 버전은 또 얼마나 재미있을지 기대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