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책 - 개정판 폴 오스터 환상과 어둠 컬렉션
폴 오스터 지음, 민승남 옮김 / 북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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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상은 구멍들로 가득했다. 정신이 통과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무의미의 틈새들, 미세한 균열들. 그리고 일단 그 구멍으로 들어가면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삶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거실에서 우연히 그 구멍을 마주한 것이다. 그것은 총의 형태로 나타났고, 그 총 안에 들어선 순간 거기서 빠져나오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나는 완벽하게 평온했고, 완벽하게 미쳐 있었으며, 그 순간이 내게 제시한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p.159


 대학 교수인 짐머는 결혼 10주년 기념일을 일주일 앞두고, 아내와 두 아들을 비행기 추락 사고로 한꺼번에 잃는다. 서른여섯 살의 아내 헬렌과 일곱 살 토드, 네 살 마르코가 죽었을 때, 그도 그들과 함께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헬렌의 부모님이 사는 밀워키로 가던 길이었고, 평소 같았으면 가족이 다 함께 갔겠지만 헬렌의 아버지가 수술을 받은 직후라 최대한 빨리 가야 했다. 짐머는 학생들이 낸 리포트를 고쳐주고, 막 끝난 학기 성적을 내느라 함께 가지 못했다. 짐머가 가장 후회되는 건 그들에게 직항기를 타라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중간에 경비행기로 갈아타는 게 걱정스러웠던 그는 큰 비행기를 타게 했고, 결과는 끔찍한 사고로 이어졌다. 그는 끊임없이 자책했고, 슬픔과 무기력에 빠져 하루하루를 술로 버틴다. 집에 틀어 박혀 몇 개월 동안 슬픔과 자기연민에 빠져 멍한 상태로 지낸다.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던 그를 붙잡았던 것은 우연히 보게 된 TV 덕분이었다. 헥터 만이라는 코미디언의 연기를 보고 6개월만에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가 누군지 전혀 몰랐고 어디서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그가 출연했던 옛날 영화 한 편의 클립이 그를 웃게 만든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아직 바닥을 치지 않았음을, 자신 안에 계속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남아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헥터 만이 예기치 않게 그의 삶으로 걸어들어온 뒤, 짐머는 그에 대한 책을 쓰는데 몰두하기 시작한다. 헥터는 1920년대에 단 1년간 활동하며 코미디 단편 열두 편을 남기고 돌연 사라진 배우이자 감독이었다. 짐머는 세계 곳곳의 영화 보관소와 아카이브를 뒤지며 그의 영화들을 찾아 보며 헥터의 영화에 대한 연구서 <헥터 만의 무성 세계>를 집필한다. 책 출간 후 그는 편지 한 통을 받게 된다. 모두가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헥터가 살아 있으며,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한 여자가 나타나 그를 먼 곳으로 데려 가는데,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고 그들을 이토록 암울하고 무자비한 입장에 처하게 만든 논리를 파악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막상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모든 게 터무니없고, 무의미하고,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 답은 책 속에 있었다. 그 이유는 책 속에 있었다. 지금 이 순간으로 이어진 생각의 근원은 책 속에 있었다. 나는 앨머의 책상에 앉았다. 원고는 컴퓨터 왼쪽에 놓여 있었는데, 높이 쌓인 종이들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돌로 눌러 놓고 있었다. 돌을 치우자 그 아래 글씨가 보였다.               p.404


폴 오스터의 초기작 <어둠 속의 남자>와 <환상의 책> 개정판이 ‘환상과 어둠’ 컬렉션으로 북다에서 출간되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이 무려 2003년이라 이번에 번역 작업도 새롭게 다시 했다고 한다. 이십 여년 전에 읽었던 작품을 다시 읽게 되니, 그때의 감정들이 새록새록 기억이 나서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특히나 이번 개정판에는 정기현, 김화진 소설가의 리뷰를 함께 수록했는데, 폴 오스터의 세계에 처음 입문하게 되는 경우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다. 튼튼한 양장본이지만 무겁지 않고, 표지 디자인도 세련된 모습으로 재탄생해서 기존에 읽어 보지 않았다면 이번 개정판으로 만나보면 너무 좋을 것 같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에게 그 이후의 삶은 덤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상실을 겪는데, 그것이 폭풍처럼 모든 것을 휩쓸어 가는 거대한 상실이든, 혹은 참고 견딜 만한 상실이든 간에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겪고 거기서 시간이 멈춘 듯 머무느냐, 혹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느냐의 차이다. 짐머가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계기는 사소한 우연일수도, 정해진 운명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후에 이어지는 헥터의 삶을 따라가는 이야기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펼쳐진다. 폴 오스터는 언젠가 스스로를 소설가보다는 스토리텔러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나는 이야기가 영혼의 일용할 양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야기가 없으면 못 삽니다. 두 살부터 죽을 때까지,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에 기대어 살아가죠.' 라고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이 '환상의 책'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본다. 인생이라는 환상, 삶이라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니 말이다. 우리는 모두 불가능한 일들을 믿고 싶어 하며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허구의 이야기인 소설을 읽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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