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남자 - 개정판 폴 오스터 환상과 어둠 컬렉션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 북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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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왜 이런 오래되고 피곤한 길들을 기어이 되짚고 있는 걸까? 왜 이 해묵은 상처들을 강박적으로 헤집어서 다시 피를 흘리는 걸까? 종종 나 자신에 대해 느끼는 경멸이라면 아무리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나는 미리엄의 원고를 보려고 했는데, 지금 이렇게 금이 간 벽을 바라보며, 과거의 잔재들, 절대 고칠 수 없는 망가진 것들을 긁어모으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다─유령들을 물리쳐줄 나의 작은 이야기.             p.73


은퇴한 문학평론가 오거스트 브릴은 또 한 차례의 불면증으로 또 한 번의 새하얀 밤을 힘들게 지나는 중이다. 그는 현재 마흔일곱 살의 딸 미리엄과 스물세 살의 손녀 카티아와 함께 살고 있다. 아내는 작년에 죽었고, 자신은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를 거의 절단할 뻔했는데 휠체어 신세가 되었다. 딸 미리엄은 이혼 후 지난 5년 동안 홀로 잠들고 있고, 손녀 카티야는 이라크 전쟁으로 연인을 잃었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 조각난 가슴을 안고 홀로 잠드는 세 사람은 각자의 고통에 갇혀 있다. 상처받은 영혼들이 살고 있는 집 전체가 비탄에 빠진 듯하다. 


브릴은 매일 밤 어둠 속에 잠 못 든 채 누워서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든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오언 브릭'이라는 남자다. 그는 깊이 3미터 정도되는 당속 깊은 구덩이 속에서 눈을 뜬다. 그는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고, 구덩이에 떨어진 기억도 없다. 그는 아내가 있고, 지난 7년 동안 직업 마술사로 일하며 아이들의 생일 파티에서 공연해왔다. 그런데 어쩌다 군복 차림으로 구덩이 바닥에 이르게 된 것일까. 그는 평생 군대에 복무한 기억도, 전쟁에서 싸운 기억도 없다. 그가 눈뜬 세상은 내전으로 분열된 가상의 미국이다. 미국은 이라크가 아니라, 미국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내전은 벌써 4년 차였고, 전쟁에서 싸우는 군인들은 자원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끌려오게 되는 거였다. 이야기 속 오언의 임무는 암살자가 되는 거였다. 바로 전쟁을 만들어낸 '이야기꾼'을 암살하는 거였다. 이 전쟁을 만들었고, 앞으로 벌어지려는 일이 모두 그의 머릿속에 있으니까, 그를 제거하면 전쟁이 멈출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자가 죽고 나서 전쟁이 끝나고 나면, 나머지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가는 걸까.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인 그들 모두가 사라지게 되는 건 아닐까, 오언은 고민한다. 




이 이야기는 자신을 창조한 인물을 죽여야만 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그 인물이 아닌 척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 자신을 이야기 안에 넣음으로써, 이야기는 현실이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현실이 아닌 것, 나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허구가 된다. 어느 쪽이든 효과는 더 만족스럽고, 나의 기분과도 더 조화를 이루게 된다. 어두운, 그러니까 얘들아, 나를 둘러싼 흑요석처럼 새까만 이 밤처럼 어두운 기분과 말이다.             p.149


결혼 생활의 종말, 아내를 잃은 후의 외로움, 거의 죽을 뻔했던 사고, 그리고 딸과 손녀가 겪고 있는 고독과 상실이 브릭을 매일 밤 잠 못들게 한다. 그가 불면의 밤 속에서 만든 이야기 속 주인공인 오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야기를 만든 자를 죽어야 전쟁이 끝나지만, 그가 죽으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 속에 갇힌 자와 그것을 창조한 자의 삶이 교차로 진행되며, 펼쳐지는 이 작품은 허구의 이야기가 상실을 견디게 하고, 삶을 지속하게 해주는 힘이라는 것을 점차 느끼게 해준다. 가상의 이야기 속으로 도피해야만 버틸 수 있는 삶이란 분명 슬프지만, 그렇게라도 견딜 수 있는 장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폴 오스터의 초기작 <어둠 속의 남자>와 <환상의 책> 개정판이 ‘환상과 어둠’ 컬렉션으로 북다에서 출간되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이 무려 2008년이라 이번에 번역 작업도 새롭게 다시 하고, 정기현, 김화진 소설가의 리뷰를 함께 수록했다. 튼튼한 양장본이지만 무겁지 않고, 표지 디자인도 세련된 모습으로 재탄생해서 기존에 읽어 보지 않았다면 이번 개정판으로 만나보길 권해주고 싶다. 사실 최근에 폴 오스터가 투병 중에 집필한 생애 마지막 장편소설 <바움가트너>를 읽었기에, 그의 초기작을 다시 읽으며 감회가 새로웠다. 과거와 현재, 허구와 환상을 넘나들며 인물의 삶을 견고하게 그려나가는 방식과 상실과 기억에 관한 그의 아름다운 사유를 좋아하는데, 이제 다시는 신간을 볼 수 없다니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폴 오스터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다 읽었는데, 매번 한번도 같은 스타일을 복기 하지 않는,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 새 한 해가 흘렀고, 시간은 속절없이 계속 지나갈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개정판 두 권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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