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섬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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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남들이 철석같이 믿는 것 혹은 믿고 싶어 하는 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서, 그 착각을 바로잡아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데서 오는 어떤 달콤함.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도 우리에게는 달콤했다. 여자들은 나이를 막론하고 항상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존재로 인식된다. 하지만 끈적끈적 아저씨가 그건 손해 보는 제로섬 게임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그것이 우리 여자들의 고질적인 실수였다고.                  - '끈적끈적 아저씨' 중에서, p.71


그들은 마을에서 몇 킬로미터 안 되는 곳에서 어린이 성매매가 이루어진다는 소문을 듣는다. 돈을 내면 동유럽, 아시아, 중앙아메리카에서 건너온 열 살에서 열여섯 살 사이의 여자아이들을 살 수 있었다. 남자 어른들을 위한 깜짝 파티는 강가의 오래된 공장 마을에서 밤중에 벌어진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몸서리치게 하고 혐오감에 이를 갈게 한 그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직접 그들을 처단하기로 결정한다. 자신들이 밤중에 깨끗한 이불을 덮고 깔끔한 침대에서 자는 동안 또래 혹은 더 어린 어린이 성노예들이 마을 외곽의 모텔에서 구역질 나는 행위를 견뎌야 했다는 데 분노했다. 그렇게 여고생들은 학교 구내식당에서 모여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끈적끈적 아저씨라는 나선형 장치를 설계한다. 그것은 파리를 잡는 거대한 끈끈이 테이프 같은 장치였다. 


야밤을 틈타 몰래, 은밀하게, 강가의 버려진 무인지대에서 그들은 거짓 소문으로 성매수자를 유인한다. 깜짝 파티가 열린다는 소문은 산불처럼 인터넷을 타고 번진다. 남자들은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한 명씩 찾아왔고, 최대한 멀찌감치 조심스럽게 차를 댔다. 모두 이런 식의 눈 가리고 아웅에 경험이 있었고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낯익은 얼굴들이 손님으로 등장해 여고생들은 망연자실해진다. 고등학교 선생님, 마을의 시의원, 누군가의 아버지와 삼촌, 사촌, 이웃들이 있었다. 그들이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던, 평범한 남자 어른들이 성도착범이었던 것이다. 가면을 쓰고 있는 여고생들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렀다.  <끈적끈적 아저씨>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강력한 성범죄 처벌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 가족도 있고 딸들도 있어요...'라는 한 남자의 간청은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가족이 있는데 왜 딸같은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서 왜 도덕적으로 해야 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지... 최악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변명과 구걸을 한다는 점이다.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여고생들이 그들을 직접 벌하는 서사는 분노와 공감을 동시에 불러 왔다. 




무관심한/제삼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여기서 흥미진진한 대목은 뭔가 하면, 상상할 수 없고 일어날 법하지 않던 일이 놀라우리만치 짧은 기간 안에 상상할 수 있고 일어날 법한 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가정이라는 익숙하고 한계가 정해진 공간 안에서 매일, 매시간 맞닥뜨리다 보면 충격적이고 괴상했던 것이 그 짧은 기간 안에 평범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 '괴물둥이' 중에서, p .312


이 책에는 표제작인 <제로섬>을 비롯해 열두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고단한 여성의 삶과 이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해 섬세하고 유려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이를 지켜보는 딸의 모습을 그린 <참새>, 부모와 자식 간의 올바른 애착 형성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저 데려가세요, 공짜예요>, 뒤통수의 생긴 혹이 마치 사람처럼 성장해가면서 가족들로부터 점점 배제되어 가는 불안을 그린 <괴물둥이>, 여아 성매매 문제를 여고생들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끈적끈적 아저씨>, 스토킹을 당하는 여성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한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는 <상사병>, 유산을 겪은 여성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그린 <한기> 등 강렬한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담겨 있다. 


자의든 타의든 스스로의 삶을 통제할 수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들 내면의 불안과 공포를 고스란히 체험하게 해준다. 여성으로서 경험하게 되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분노는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들이기에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성매매, 스토킹 같은 범죄 행위 뿐만 아니라 임신과 출산, 유산, 육아 등 여성이기에 느낄 수 밖에 없는 경험들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강렬한 이야기 속에서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인 분위기와 극도의 긴장감이 잘 버무려져서 한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게 만들곤 한다. 인간이 가진 근원적 공포와 폭력적인 세상이 휘두르는 공포를 꿰뚫는 이야기를 조이스 캐롤 오츠만큼 잘 쓰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극중 부조리와 폭력으로 가득한 여성들의 실상이 현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약자로 하여금 사적 제제를 집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 속에 우리가 살고 있기에, 이 작품 속 이야기는 현재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사회와 폭력에 대처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 음울하지만, 강렬한 방식으로, 사악하지만 매혹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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