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마음은 설명되지 않는다 - 우울증 걸린 런던 정신과 의사의 마음 소생 일지
벤지 워터하우스 지음, 김희정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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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정신의학에서는 어떤 것에도 100퍼센트 확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한다. 정신과 의사는 항상 회색 구름 속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가끔 사이키델릭한 광기의 색이 주변을 밝히곤 한다. 정신 질환 사례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증상만 해도 수천 가지 조합이 존재한다. 데이미언의 '비전형적인 증상'은 이상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상한 것을 전문으로 하는 게 우리 직업 아닌가?             p.176~177


영국 NHS 정신과 의사 벤지 워터하우스는 어느 날 병원에 가서 항우울제를 처방받는다. 처방전에는 '플루옥세틴 20밀리그램 1일 1회 복용'이라고 쓰여 있었다. 자신이 날마다 환자들에게 처방하는 바로 그 약이다. 극적으로 사회적 환경을 변화시킬 힘이 없는 상황에서 전천후, 다목적으로 쓰는 정신의학계의 아스피린 같은 약이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가 어쩌다 우울증에 걸린 걸까. 이 책은 벤지 워터하우스가 영국의 공공 의료 기관 NHS의 정신과 의사로 일한 10년을 담은 회고록이다. 


날마다 수백 명의 정신과 의사가 런던 동서남북 전역에서 정신이 아픈 사람들을 돌본다. 하지만 밤이 되면 달라진다. 영국 수도의 세 자치구에 사는 백만 명이 넘는 인구를 커버하는 관할 구역에서 밤 근무를 하는 의사는 다섯 명뿐이다. 저자는 그날 당직 근무를 서던 중이었다. 새벽 4시, 무선호출기가 울린다. 저자는 호출기에 뜬 번호를 전화기 다이얼에 찍는다. 환자를 하나 보내겠다는 응급실 수간호사의 연락이었는데, '35세, '자살 다리'에서 뛰어내림'이라는 정보를 가진 환자였다. 운 좋게 가시덤불에 떨어져 얕은 자상을 입고 성형외과에서 처치 후, 손목 골절은 정형외과에서 치료했고, 이제 정신과 차례라는 거였다. 문제는 NHS 번호를 확인했더니 이름이 떴고, 자신이 아는 이름이었다는 거다. 저자는 자신의 환자가 자살 미수로 응급실에 실려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의사로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다. 정신과 수련의로 일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그는 결국 우울증을 진단받는다. 




"조지프, 정신 질환이 감염병처럼 옮는 병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뭔가를 흡수하는 건 맞는 것 같아요. 혈관 외과에서 일할 때는 근무가 끝나고 나면 매일 수술복을 빨았어요. 썩은 생선 냄새가 났거든요. 소화기 내과에서 일할 때는 냄새가 어땠을지 짐작하시겠죠. 하지만 정신과에서는 공기 중에 사람들의 고통이 떠다녀요. 그런 고통은 세탁기에 옷을 빤다고 사라지지 않고 늘 따라다녀요."

조지프는 내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다. "어쩌면 고통을 일부 흡수하는 게 다른 사람을 돕는 대가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가 말한다.             p.359


이 책은 현대 정신의학의 진단 체계부터 다양한 정신 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에피소드와 스스로 우울증을 앓으면서 겪게 된 내밀한 고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날마다 환자에게 처방하던 약을 처방받고 나서야 마음의 고통이란 뇌의 신경학적 불균형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통의 근원이 남아 있는 한 항우울제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의사로서 환자와 교감하는 동시에 환자로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펼쳐지는 고뇌와 딜레마의 여정은 깊이 있는 공감과 이해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우울증은 '화학적 불균형'이 원인이고, 양극성 장애는 창의적 천재를 낳고, 조현병은 '분열된 뇌를 가진' 도끼를 휘두르는 살인자를 만들어낸다고 믿는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저자가 말한 그대로 생각했었다. 정신 질환은 다리 골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 정신 질환은 어쩐지 골치 아프고, 꺼림칙하고, 숨겨야 하거나 피해야 하는 두려운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항우울제를 처방받고 나서야 진단명에 가려진 환자들의 복잡한 사연과 상처를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컨베이어 벨트 위 과일에 스티커를 붙이듯이 환자들의 증상만 보고 조현병, 양극성 장애, 인격 장애 같은 진단을 내렸던 과거와는 달라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정신 병동이라는 가장 특수한 공간에서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의 살피게 된다. 이 책이 더욱 특별한 것은 조현병, 양극성 장애, 인격 장애, 약물 남용 장애 등 심각한 질환을 앓는 중증 환자들이 계속 등장하지만, 어둡고 무겁지 않고 일종의 블랙코미디처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어릴 적 아버지의 학대로 경계성 인격 장애를 앓거나, 불안한 일이 생기면 마약이나 알코올, 자해를 시도하고, 머릿속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를 듣는 등 대부분 강제 입원하거나 여러 번 응급실을 들락 거릴 정도로 상태가 심각한 환자들이 등장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그런 사연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들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과정 속에서 정신의학의 실제 현장을 생생하고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는 직접 경험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지점들이 분명 있고, 그것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정신과 의사의 유쾌하고, 신랄하면서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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