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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바람 위에 있어 ㅣ 열다
헤르만 헤세 지음, 폴커 미헬스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 하늘에 떠 있는 아름다운 구름이여, 안식을 모르는 구름이여! 나는 철없던 시절부터 구름을 사랑했고 구름을 보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나 또한 한 점 구름처럼 살아가게 될 줄은, 어디서든 낯선 존재로서 시간과 영원 사이를 둥둥 떠다니며 방랑하게 될 줄은. 어린 시절부터 구름은 나의 사랑스러운 연인이자 누이였다. 나는 길을 걸을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린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나누었고, 잠시 눈을 마주쳤다. 그 시절 구름에서 배운 것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p.21
거장들의 품격 있는 문장과 사유를 소개하는 열림원의 '열다' 시리즈, 그 다섯 번째 책이다. 헤르만 헤세의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빈센트 반 고흐의 <싱싱한 밀 이삭처럼>, 버지니아 울프의 <모두의 행복>, 로베르트 발저의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에 이어 이번에 나온 것은 헤르만 헤세의 <구름은 바람 위에 있어>이다. 에세이, 시, 소설, 편지 등 다양한 장르의 글과 사유의 흔적들을 찾아 모으고 엮은 것이 이 시리즈인데, 이번 책은 헤르만 헤세의 산문, 시, 단편 중 ‘구름’을 테마로 삼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새롭게 엮은 것이다.
사실 헤르만 헤세는 시도 때도 없이 변덕스럽게 변하는 구름의 다채로운 변주에서 많은 영감을 이끌어낸 작가로 유명하다. 초기 작품 <페터 카멘친트>를 여는 유명한 대목 "이 넓은 세상에서 나보다 구름을 잘 알고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는 어쩌면 헤세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만년의 소설 <유리알 유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와 성찰, 자연 묘사로 구름에 대해 표현하고 해석해 왔다. 이번 책은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을 모은 것이다. '열다' 시리즈의 첫 포문을 열었던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도 헤세의 글을 모은 것이었기에, 함께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고요히 움직이고 많은 갈래로 나뉜 이 흐린 하늘이 내 마음의 반영인지, 아니면 내가 내 마음속 이미지를 단순히 이 하늘에서 읽고 있는 것뿐인지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때로는 이 모든 것이 너무 불확실하다! 어떤 날은 지구상의 누구도 공기와 구름의 분위기를, 색조와 향기, 습도의 변화를 나처럼 예민한 시인과 방랑자의 감각으로 정밀하고 섬세하고 충실하게 관찰하지는 못할 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다 오늘 같은 날이면, 내가 정말 이 모든 걸 실제로 보고 듣고 냄새 맡았는지, 아니면 내가 인지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외부로 향한 내 마음속의 이미지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p.91~92
어릴 때는 구름이 솜사탕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가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했었다. 자라면서 비행기도 타고, 비행기 창문 너머로 구름을 보기도 하고, 과학 시간에 원리에 대해 공부하면서 구름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되고 꽤나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속 어딘가에는 어린 시절 꿈꾸었던 구름 조각들이 아직 남아 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기상 현상이 아주 많지만, 구름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것도 없을 것이다. 매일, 아무때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관찰할 수 있으니 말이다. 푸르른 여름 하늘과 예쁜 뭉게구름을 보고 있자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풍경 속으로 쓱 들어간 듯한 느낌도 든다.
구름은 손으로 잡을 수 없고 그저 눈으로만 볼 수 있다. 구름은 공간에 실체감을 부여해 텅 비어 있는 하늘을 가득 채워준다. 헤르만 헤세는 구름을 보다 시적인 대상으로 그려내고 있다. '구름은 허공을 뚜렷이 가시화함으로써 공기의 움직임을 더 생생하게 인지하게 해'주고, '지상의 물질로서 그것 말고는 다른 어떤 물질도 볼 수 없는 저 높은 상공에서 여전히 지상의 물질적인 삶을 이어 간다'고 말한다. 그는 여러 작품에서 이 넓은 세상에서 자신보다 구름을 잘 알고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이 세상에 구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썼다. 구름에 대한 그의 애정이 페이지 곳곳에 묻어나서, 정말 오랜 시간 구름에 대해 사유하고, 관찰하고, 글을 썼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구름의 움직임이 노래가 되고, 언어로 빚어져 시가 되고, 어느 순간 구름의 표정과 몸짓이 눈앞에 고스란히 보이는 듯한 느낌이 되는 그런 책이었다. 헤세의 책은 많이 읽어왔지만, 이렇게 '구름'에 관련된 글만 모아서 한 권이 되니 또 색다른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열다' 시리즈 다음 책에서는 또 어떤 작가의 글들을 만나볼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