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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일을 멈추고 바닷속으로
조니 선 지음, 홍한결 옮김 / 비채 / 2025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데드라인도 내게 어떤 행복감을 준다. 일종의 평온함이다. 데드라인이 다가온다는 것은 어찌 보면 평온한 상황이다. 삶의 변수를 모두 단순화하는 느낌이랄까. 데드라인과 관련 없는 일은 모두 존재가 희미해지고 만다. 데드라인이 없으면 내 앞에 놓은 시간이 너무 막연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 자유로움에 오히려 숨이 막힌다. 마치 '쓸 수 있는 시간'이라는 커다란 빈 캔버스를 바라보면서 최적의 활용 방안을 찾아야 하는 듯한 기분이다.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나? p.56
현대인들은 누구나 번아웃 상태이고, 늘 시간이 부족하다. 뭔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를 잠깐 내려놓고, 느긋이 쉬면서 충전할 방법을 찾아 보기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간에 '생산적'으로 보내지 않은 시간에 대해 우리는 약간의 죄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잘하는 게 너무 많을 수록,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 책의 저자인 조니 선처럼 말이다.
에세이스트, 일러스트레이터, 시나리오 작가, 프로듀서, 극작가, 설치예술가, 연구원으로 경계 없이 활약하고 있는 저자는 어느 날 갑자기 쉼 없이 달려온 일상을 멈추고, 돌연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언한다. 이 책은 강박에 사로잡힌 작가가 번아웃 이후 ‘진짜 휴식’을 취하며 남긴 글과 그림을 모은 에세이이다. 라인 드로잉 그림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낙서와 일기, 단상들이 가볍고 유쾌하게 펼쳐져 있는데 예술가의 기발한 머릿속을 엿볼 수 있어 아주 흥미로웠다. 계란 스크램블 만들기로 시작해서 차예단 말들기, 날계란밥 만들기, 계란찜 만들기, 완숙 계란 만들기, 천년계란 만들기... 등등 레시피가 이어지는 장도 있는데, 요리를 하는 사이사이 가족들간의 일상 에피소드가 더해져 있어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재미있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과거와 현재를 너무 말끔히 분리하면 문제가 생긴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여전히 과거의 나와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한 일이 모두 내가 아니라 과거의 어린 내가 한 일이 되고,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이 모두 내가 아니라 미래의 나이 든 내가 할 일이 된다.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늘 뭔가 하려고 할 뿐 아무것도 한 게 없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신세다. 현재의 나는 그 모든 나 중에서 가장 쓸모가 없다. 삶을 항상 그런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걱정스럽다. p.148
다육식물, 선인장, 에어플랜트, 크로톤, 마란타, 피토니아 등 식물 키우기에 관련된 에피소드도 많은데, 식물을 잘 키우는 것도, 많이 키우는 것도 아닌 평범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식물 이야기라 더 재미있었다. 다육식물을 번식시키려면 밑동에서 건강한 잎 하나를 떼어내는 방법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저자가 떼어낸 잎은 항상 말라버리고 만다는 이야기부터 죽어가는 선인장을 부모님께서 데려가셨는데, 이후 삐딱하고 기우뚱한 기둥 모양을 계속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놀라웠다는 에피소드도 귀여웠다. 이상한 모양으로 자란 선인장 기름도 수록되어 있는데, 아주 귀엽다. 식물이란 늘 가만히 있고 무의미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식물을 하나둘씩 집에 들여놓고 돌보면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짙은 녹색 잎에 선명한 분홍색 잎맥이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나 있는 마란타라는 식물은 밤이 되면 잎이 위를 향해 꼿꼿이 선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세상을 향해 활짝 펴져 있다. 나 역시 마란타를 데리고 있어서 저자의 묘사한대로 마란타의 행동을 알고 있는데, 저자는 이를 통해 식물의 삶에도 질서와 규율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책의 제목처럼 '하던 일을 멈추고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갈 필요가 있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럴 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상쾌하게 수영 한번 하면서 걱정거리와 고민, 해야 할 일들을 한쪽에 내려놓는 거다. 제일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실천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이 책에는 휴식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마음, 일을 미루는 동안 더 복잡해지는 생각, 쉬는 중에도 일 언저리를 맴도는 강박적 태도 등 진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가족들과의 추억과 일상 풍경 등 소소하고 다정한 이야기들도 담겨 있어 공감하며 읽었다. 자, 쉬고 싶지만 오늘도 쉬지 못하는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