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O
매슈 블레이크 지음, 유소영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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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파트는 고요했지만 어디서 바스락 소리가 날 때마다 내 몸은 자동으로 반응했다. 위층에서 잠들어 있는 키티가 생각났다. 잠자는 동안 인간은 무력하다. 나는 일어나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히치콕 영화의 깜빡거리는 불빛이 벽을 비추고 있었다. 고독에 숨이 막혔다. 범죄, 수면, 야경증. 인간 심리의 온갖 기괴한 서커스는 이제 정말 지긋지긋했다. 따뜻하고 깨끗한 시트 밑에 들어가서 옆에 누운 클래라의 체온을, 난로와 보금 자리와 그녀의 안전함을 느끼고 싶었다.                  P.69


2019년 8월 30일 오전 3시 10분, 그림자내각 각료의 딸이자 잡지 <엘리멘터리>의 창간인인 25세의 안나 오길비는 옥스퍼드셔의 휴가용 농장 오두막에서 21센티미터 길이의 부엌칼과 함께 잠든 상태로 발견된다. 이웃 오두막에는 안나의 단짝 친구 두 명이 시체로 발견되었고, 각각 열 군데씩 자상이 발견되었다. 안나의 지문이 칼에 묻은 유일한 자국이었고, 옷에 묻은 핏자국은 두 피해자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안나가 깊은 잠에 빠지기 전에 범행을 부분적으로 자백한 왓츠앱 메시지가 그녀의 휴대전화에서 발견되었다. 피해자와 용의자가 명백해 보이는 이 사건은 수 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는다. 


용의자인 안나가 잠이 든 상태로 다시 눈을 뜨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고, 안나의 신체 활동에도 이상이 없었다. 수많은 전문가가 안나를 깨우려고 수없이 노력했지만 그녀는 잠든 채 반응이 없었다. 안나의 가족들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어머니인 에밀리 오길비 남작은 상원의원직을 내려놓았고, 글로벌 펀드매니저인 아버지 리처드 오길비는 새 사무실을 열려던 계획을 연기한다. 1년 뒤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았고, 6개월 뒤 오빠인 테오 오길비는 마약 과용으로 거의 죽을뻔한 위기를 넘기고 남미로 이민을 떠났다. 그야말로 가족이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대체 폭력 전과도 없는 스물다섯 살의 여자가 동료 두 명을 스무 번씩 칼로 찔러 죽인 이유는 뭘까. 그녀는 대체 왜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것일까. 아무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수면 범죄 전문가인 베네딕트 프린스 박사에게 의뢰가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과연 그는 안나를 잠에서 깨워 사건의 진상을 밝혀낼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지?" 나는 묻는다.

"다른 모든 이야기가 끝나듯이." 안나가 대답한다. "정의로운 자가 살아남고 악당들은 죽겠지. 악이 파괴되고 질서가 회복되고. 안녕, 박사님."

그 순간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왕자를 남겨두고 머나먼 왕국으로 떠난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P.481


잠든 사이 저지른 살인은 유죄일까, 무죄일까? 이 작품은 수면 중 범죄와 체념증후군이라는 독특한 현상을 소재로 해 깊이 있게 고민하고 있다. 판례의 경우, 몽유와 관련된 살인 사건은 심신상실로 인해 무죄 판결을 받은 경우가 더 많았다. 몽유 중의 행동은 자기 의지 없이 발생하기 때문에, 몽유병은 법적인 방어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신미약 혹은 심신상실로 인한 비자발적 행위였다는 것이 증명되면 면책 판결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극중 안나는 잠든 살인자일까 아니면 침무 속에 갇힌 피해자일까. '체념증후군'이라는 개념은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는 뇌에서 발생한 기질적인 질병이 아니라 정신 그 자체의 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희망이 사라져서 완전히 부재하는 현실을 직면할 때 겪는 병이라고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스웨덴의 난민 공동체 환자들로 지옥 같은 시리아와 중동에서 탈출한 아이들이 몇 달, 혹은 몇 년씩 잠에서 깨지 않는 수명 장애를 겪었던 것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매슈 블레이크는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한 이력 덕분인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장면들이 눈앞에 보이는 듯한 생생함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분량의 심리 스릴러임에도 한 순간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이 작품은 그의 데뷔작으로 출간과 동시에 마흔 개 국가와 출간 계약을 맺었고 현재 넷플릭스에서 영상화가 진행 중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문구가 생각날 정도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놓치지 않고 읽게 만드는 마성의 심리 스릴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매력적인 소재와 탄탄한 구성과 몰입도 있는 전개, 연속되는 반전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게 잘 쓰인 작품이다. 올 여름의 무더운 날씨를 잊어 버리게 해줄 만한 소설을 찾고 있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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