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 기존의 호혜, 증여, 분배 이론을 뒤흔드는 불확실성의 인류학
오가와 사야카 지음, 지비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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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들은 늘 “아무도 믿지 않아”라고 단언한다. 이는 ‘본성’,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사업’을 몰라서 그런다기보다 누구나 처한 상황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변모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인다. 카라마와 동료들은 “저 사람은 지금 잘나가니까 돈을 빌려줘도 괜찮아”...라고 ‘지금’의 상황에 한정하는 형태로만 타자를 평가한다. 언뜻 냉정하게도 보이지만 이는 일종의 관용과도 표리일체다. 즉, ‘페르소나’와 그 뒷면에는 ‘민낯’이 있는데 ‘민낯’을 모르니까 신뢰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일관된 불변의 자기(自己) 같은 건 없다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p.91~92


영화 <중경삼림>이 홍콩의 청킹맨션을 주요 배경으로 했던 이유는 그곳이 여러 문화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얽혀 있어 마치 축소된 세계와도 같기 때문이었다. 실연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밤마다 청킹맨션 근처를 배회하던 주인공 경찰은 마약 밀매업자와 얽히게 되고, 그 여인 또한 인도인들의 배신과 백인 사장과 여러 문제로 얽혀있다. 청킹맨션은 그렇게 불법적인 마약 거래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라는 상징을 갖고 있는 동시에 관광객들에게는 저렴한 숙박시설로, 홍콩인들에게는 오래되고 낡아 재건축되어야 하는 흉물로 인식되는 곳이다. 일본의 문화인류학자 오가와 사야카는 홍콩의 청킹맨션에 체류하던 중 ‘청킹맨션의 보스’라 불리는 카라마를 만나게 되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수상쩍은 비즈니스와 그들만의 공유 경제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얻게 된다. 


청킹맨션의 보스 카라마와 탄자니아인 주민들은 그 누구도 믿으면 안된다고 말하면서도 우연히 만난 사람을 기꺼이 집에 머물게 하고, 서로 돈을 빌려주고, 믿었는데 배신당했다고도 말한다. 남이 살아가는 방식에 그다지 참견하지 않으면서도, 궁지에 빠졌을 때 서로를 돕는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있다. 제각각이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이 기묘한 삶의 방식은 '믿지 않아도 연결되는 사회'를 향한 인류학적 상상을 완성시킨다. 이들은 타자의 '사정'에 개입하지 않고, 구성원 사이의 의무와 책임도 불문한 채, 각자 '겸사겸사'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열린 호수성'을 기반으로 부담 없는 '서로 돕기'를 통해 국경을 초월하는 거대한 안전망을 만들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청킹맨션의 거주자들은 대체로 불법 체류, 불법 노동을 하고 있거나 불법이라고 불릴 만한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하루에 6천 불을 버는 부자도 있고 한 끼 챙겨먹 기 힘든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서로 친하지만 깊이 믿지 않는다. 믿지 않더라도 서로를 돕는다. 배신을 당해도 또다시 손을 잡고, 보답을 바라지 않고 기꺼이 손을 내민다. 뭔가 모순적인 공동체이지만, 그만큼 굉장히 효율적인 구조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안심’, ‘안전’을 부르짖으며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준다는 확약 없이는 줄 수 없는’ 사회적 관습을 강화하고 ‘빌려준 것’과 ‘빌린 것’을 즉시 청산하려는 태도를 낳는다. 문자메시지도 친절도 곧바로 답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에 빚을 남겨두는 것이 걱정이다. 그러한 관계에서는 내가 준 것과 상대방이 준 것이 등가인지, 매 순간 빌려준 것과 빌린 것을 셈해서 딱 맞아떨어지는지 신경 쓰인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면 선순환의 상호성은 손쉽게 악순환의 상호성으로 전화(轉化)한다.               p.259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개념은 '내가 널 도우면 누군가 나를 도와줄 것이다'라는 홍콩 탄자니아인들의 원칙이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니까, 나에게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누가 날 도와줄 수 있을 지는 모르기 때문에 이런저런 동료들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들이 상대를 불문하고 돕는 까닭은 자신이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홍콩에서 장사를 시작한 그들은 수없이 궁지에 빠지고, 인생의 위기들을 극복해왔다. 그리고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만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분명 누군가가 도와준다'라는 신념은 '동포에게 친절히 대해야 한다'는 기대가 아니라, 각기 다른 인간들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가능성에서 주고받기의 기회를 발견해내는 각자의 '지혜'에서 비롯한다. 카라마의 휴대폰에는 정보 고관이나 대기업 사장, 사기꾼, 도둑, 전과자까지 온갖 사람이 등록되어 있었는데, 이들과의 네트워크 또한 '겸사겸사'에 의해 구축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겸사겸사’ 정신은 호수성(호혜)이나 증여의 불균형이 문제가 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이 책은 느와르 영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인물들을 가지고 매우 사실적인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웬만한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흥미로웠다. 그야말로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쉽고 재미있게 쓰인 인류학 책이 아닌가 싶다. 기존의 호혜·증여·분배 이론을 뒤흔드는 ‘겸사겸사’의 철학은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이들만의 독특한 개념이다. 내가 준 도움이 돌고 돌아 나중에 어떤 기회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느슨한 기대를 바탕으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타인을 돕는 마음은 우리가 이질적인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공존의 모델을 제시한다.현대의 부조리하고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나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커먼즈와 공유경제를 완전히 다르게 상상하고 실천하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세상의 어떤 인간도 신뢰할 수 없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이들의 사고방식은 인류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인류학 책을 지금 바로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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