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
온다 리쿠 지음, 이지수 옮김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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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말이야, 뭔가가 납득이 되면 여기가 딸깍 하고 울리거든. 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댔다. 사실 그 체조 클럽에서 공중회전을 했을 때는 딸깍 하고 울렸어. 그건 신기했지. 그때 뭔가 예감은 했던 것 같아. 하지만 집에 가는 길에 엄마가 물어봤을 때, 그 장소는 아니라고 본능적으로 느꼈어. 흐음. 그럼 그때는 아직 발레가 머릿속에 없었던 거네. 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발레의 ‘ㅂ’도 없었어. 내 사전에는 아직 ‘발레’가 없었지. 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는 문득 먼 곳을 바라봤다.               p.131~132


준은 발레 워크숍에서 유달리 눈길을 끄는 사람을 만난다. 이곳은 해외 발레단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해외의 발레 학교로 유학을 가기 위한 전단계로 여겨지는 곳이다. 아무나 참가할 수 없고, 사전 오디션인 레슨을 통해 선발이 되어야 본 워크숍에 참가할 수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을 유심히 관찰하다 보면 프로를 목표로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 수 있다. 무용수로서의 기량과 가능성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발견했을 때 준이 느꼈던 것은 말로 잘 표현할 수 없었던 위화감이었다. 무언가 다른 질감을 가진 것, 무언가 주위와 다른 존재를 느꼈던 것이다. 


호리호리한 인상에 비율이 좋은 축복받은 체형이었다. 요로즈 하루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자신의 이름이 가진 만 개의 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루는 기량도 뛰어났지만, 매번 춤 너머로 무언가 드넓은 풍경을 바라보는 재능이 있었다. 춤추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춤은 어디까지나 수단이며 목적은 그 너머에 있다는 듯이. 결국 하루는 무용수가 아니라 안무가로 세상을 움직이는 존재가 된다. 


이 작품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기 다른 화자가 등장해 저마다의 시선으로 요로즈 하루라는 인물의 삶을 들여다본다. 동료 무용수인 후카쓰 준을 시작으로, 그를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온 영문학 교수인 미노루 삼촌, 그의 안무에 곡을 써주는 작곡가 다키자와 나나세,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하루 본인이 화자로 등장한다. 발레 학교 시절이 배경일 때는 하루의 청소년기를 엿볼 수 있고, 가족인 삼촌이 화자일 때는 어린 시절의 일화들을 만날 수 있다. 작곡가와 협업하는 과정이 보여질 때는 작곡과와 안무가의 긴밀한 관계와 천재성이 보여지고 있어 각각의 이야기가 한 인물의 생 전체를 퍼즐 조각처럼 하나씩 완성시켜 나간다. 외부에서 바라보던 시점으로 읽히던 인물이 일인칭이 되면 보다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안무를 만들어 가는 과정과 무대에서 무용수가 공연을 하는 장면들이 매우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어 실제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드는 그런 작품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본’ 것만 같았다. 인간이라는 생물이 그저 순수하게, 움직인다는 목적을 위해, 아름다운 형태만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을. 저걸 내 몸으로 재현해보고 싶다. 역시 첫 체험의 충동에 자극을 받아, 어느새 나는 뛰어오르고 있었다.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착지한 순간, 가슴 한복판에서 딸깍 하고 무언가가 울렸다. 그 순간을, 그 감각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세상의 문이 열렸다고 해야 할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나는 온몸으로 그 충격을 받아들였다. 감격과 전율과 환희와 절망이 뒤섞인 충격을.                p.408~409



온다 리쿠 데뷔 30주년 기념 작품이다. 구상부터 집필까지 10년 만에 탄생했는데, 작가는 클래식 발레의 세계를 탐구하다 이후 컨템퍼러리 무용으로까지 관심을 넓혀가며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판타지, 미스터리, SF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60여 편이 훌쩍 넘게 발표해왔는데, 이 작품은 <초콜릿 코스모스>, <꿀벌과 천둥>에 이은 '예술가 소설' 3부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초콜릿 코스모스>가 연극, <꿀벌과 천둥>이 피아노, 그리고 <스프링>이 발레의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초기작인 <초콜릿 코스모스>를 너무 좋아했었는데, 연극 무대를 배경으로 타고난 천재와 노력파 두 여배우의 대결 구도와 오디션의 뒷 이야기들이 아주 흥미진진했었다. 얼핏 '유리가면'을 연상시키기도 했었는데, 평소에도 온다 리쿠가 연극의 한 장면 같은 연출을 자주 사용해 왔던 터라 그 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었다. 


<꿀벌과 천둥>은 일본서점대상과 나오키 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증명해낸 작품이기도 하다.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한 피아니스트들의 경쟁과 음악 비즈니스의 세계를 함께 다루었던 작품인데, 화려한 비유를 통해 음악을 글로 묘사해내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이번에 나온 <스프링>은 발레 무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오디션이나 무대 뒤의 경쟁 등을 다루지 않을까 했는데 온다 리쿠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천재 무용가가 등장하지만, 그는 상대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단계를 처음부터 초월해버린 듯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춤을 추는 것을 넘어서 춤 동작과 서사를 만들어 내는 안무가로서의 면모가 더욱 부각되는 인물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예술 그 자체에 더욱 집중하는 서사가 만들어졌다. 그는 누구라도 한순간 느꼈던 부러움과 질투마저 금세 사라지게 만드는, 약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보통 탁월한 재능이 등장하면 라이벌 구도라든가 경쟁에 중점을 두게 마련인데, 온다 리쿠가 다른 선택을 한 걸 보면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로서 쌓아온 시간만큼 예술을 다루는 방식도 달라지고, 그만큼 이야기에 깊이가 더해진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작품이었다. 그래서 온다 리쿠의 거의 모든 작품을 읽어온 독자로서 이번 작품은 더욱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언어로 빚어낸 아름다움이 페이지마다 만발하는, 만 개의 봄을 느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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