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방은 빛을 쫓지 않는다 - 대낮의 인간은 잘 모르는 한밤의 생태학
팀 블랙번 지음, 한시아 옮김 / 김영사 / 2024년 1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방이 식물과 인간에게 중요한 수분 매개자라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약 5000만 년부터 1억 년 전 사이에 나방의 다양성이 식물의 다양성과 함께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방이 작물과 다른 식물에 미치는 중요성을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했다. 꽃을 찾는 곤충에 관한 연구가 대부분 낮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인 자두, 체리, 사과, 멜론, 호박, 아보카도, 마카다미아, 카다멈을 생산하는 데 벌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두 잘 안다. 나방도 벌만큼이나 귀중할 것이다. 단지 대개 어둠 속에서 조용하고 묵묵히 자신들의 일을 할 뿐이다. p.13
나비나 벌과는 달리 나방은 사람들에게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나방은 흔히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작물과 식물을 파괴적으로 소비하는 종도 있어 해충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민속학에서 나방은 자주 죽음과 연관되고, 대중문화에서는 양들의 침묵에 등장하며 식인 연쇄살인범과 연관된다. 사람들이 나방이라는 말만 들어도 미간을 찡그리게 되는 비호감이 된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생태학자 팀 블랙번은 나방을 사랑해 마지않을 이유가 아주 많기 때문에,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나방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동물이며, 우리가 이 지구를 함께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생물의 일부라고 말이다.
저자는 아내에게 쉰두 번째 생일선물로 검은색 플라스틱 상자를 받는다. 투명 아크릴판 두 장과 20와트 형광등이 달린 이 상자는 바로 '나방 덫'이었다. 이것은 허공에서 생명을 만들어내는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상자이기도 했다. 7월의 어느 저녁에 저자는 상자를 밖에 내놓고 전선을 연결한 뒤 전구가 서서히 빛을 발하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기대감에 부푼 채 상자를 보러 간다. 그리고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보석이 흩뿌려져 있었다. 정말로 상자가 마법을 부린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The Jewel Box'이다. 저자가 상자 속에 가득한 나방들을 보며 '보석이 흩뿌려져 있었다'고 표현했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책 속에는 상자와 상자 속의 나방들 사진까지 수록되어 있어 이해를 도와준다. 상자 속에는 나방이 80마리가 넘게 있었고, 모든 종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 저자는 나방들을 그들의 이름과 천천히 연결 짓기 시작한다. 한국밤나방, 배저녁나방, 나무이끼나방, 매미나방, 저지호랑이나방, 창백한버드나무얼룩나방 등 그렇게 82마리의 나방이 28개의 종으로 분류된다.

나방 덫의 내용물은 지구의 생명이 존재한 40억 년에 걸쳐 펼쳐진 연속극의 한 장면이다. 이 연속극의 배경은 자연이고, 그 안의 생태계가 각본을 쓴다. 그러나 등장인물은 진화의 과정을 통해 선택되는데, 인류는 여기에도 관여한다. 우리와 집을, 나라를, 지역을, 지구를 공유하는 종의 수는 궁극적으로 종분화에서 멸종을 뺀 결과다. 그리고 여기에 이주의 효과가 산재해 있다. 이제 우리가 멸종률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해졌다. 현재 멸종의 속도는 공룡이 멸종한 대멸종을 제외하면 우리 예상보다 100~1000배쯤 빠르다. 지구 처지에서는 인간의 존재가 소행성 충돌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p.403
저자가 나방 덫을 옥상에 설치하는 이야기로 시작한 이 책은 그 작은 나방으로 거대한 자연의 퍼즐을 하나씩 맞추어나간다. 그리고 나방의 생태계 속에 담긴 자연의 규칙, 나방의 삶과 죽음 속에서 배울 수 있는 생태학의 여러 이론과 개념들을 살펴보며 생물 다양성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준다. 30년 넘게 생물 다양성 연구에 몰두해온 저자는 이 책이 나방에 관한 책은 아니라고 말한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봉쇄된 시기, ‘나방 덫’에 찾아온 나방의 이름을 찾고 놓아주는 취미에 빠져든 저자는 점차 생태학자의 시선으로 나방의 삶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방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저자는 나방 안에는 40억 년의 지구가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방은 빛에 이끌려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주변 나무나 덤풀 속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숨어 살아가는 데 매우 익숙하다. 나방은 대부분 작으며, 짧고 굵게 산다. 나방은 아무리 커도 포식자인 새나 박쥐에게 맞설 수 없다. 따라서 몸집을 키워 양질의 알을 낳는 대신, 덜 성장하더라도 잡아먹히기 전에 빨리 알을 낳기로 ‘선택’했다. 주어진 환경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나방의 생태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했고, 나방이 벌 못지않은 중요한 수분 매개자라는 사실도 놀라웠다. 밤에 활동한다는 이유로 낮에 활동하는 인간에게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였는데, 이 책을 통해 '재발견'하게 된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자연을 관찰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새삼 깨달았다. 이 책을 통해 '과연 나는 자연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시간이 된다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생태학을 통해 나방 덫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마법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자, 매일 밤 어둠 속에서 관찰한 신비로운 밤의 세계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