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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 ㅣ 텍스트T 12
이희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부르인은 때때로 화이거에게서 보이지 않는 벽을 느꼈다. 화이거는 비스족의 평화를 지키는 수호자이지만 비스족 이외에 모든 것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지녔다. 피가 튀고 뼈가 잘리는 전장에서는 과감하게 검을 휘두르는 그가 개혁과 변화 앞에서는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다.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 것이 마음의 적이죠. 두려움은 막아 내는 게 아니라 이겨 내는 겁니다. 그것이 전사의 정신 아닙니까?” p.125~126
가장 아름답고 기름진 풍요의 땅 실바에 사는 비스족은 오랜 시간 타 부족과 크고 작은 전쟁을 치뤘고, 이제 다른 어떤 부족도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는 강한 힘을 얻었다. 평화의 시대가 왔지만 언제 또 매서운 피의 계절이 돌아올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몇 해 전, 주변의 크고 작은 부족들 중 가장 수가 적고 약한 무리인 피프족이 전설로 내려오는 땅 사라아로 갔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비스족을 다스리는 '쿤'인 부르인은 아무도 시도하지 못한 엄청난 일을 해낸 그들의 비밀이 궁금했다. 곧 열일곱 살이 되는 베아는 비스족을 다스리는 '쿤'인 부르인의 딸이다. 베아와 어린 시절부터 친구인 타이는 쿤을 보호하며 타 부족의 공격으로부터 비스족을 지키는 전사의 수장인 '솔'의 아들이다.
부르인과 솔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베아는 전설의 땅 사라아를 찾기 위해 죽음의 숲 케이브로 가보겠다고 자진해서 나선다. 그렇게 쿤의 후계자인 베아와 그녀를 지키기 위해 여정을 함께 하게 된 소꿉친구 타이는 전설의 땅 사라아를 찾기 위해 죽음의 숲 케이브로 향한다. 사실 베아는 자신이 왜 후계자로 정해졌는지 그 이유에 대해 의문이었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은 비스족을 대표하기에 부족한 점이 많다고 느꼈다. 그렇게 때문에 죽음의 숲에 가고자 했던 것이다. 피프족이 그 죽음의 숲을 통과했다면 분명 비스족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삶과 진짜 검으로 승부를 겨룰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안락한 실바를 떠나 더 넓은 세계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이 작품은 테아와 타이가 죽음의 숲 케이브를 지나며 정체성을 찾아가고, 성장하게 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정말 이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 베아는 수없이 자문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고, 얼마나 큰 오류를 범했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뻥 뚫린 가슴 속으로 사막의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텅 빈 공간에 싸늘한 분노가 차올랐다. 혹여 이 모든 불행이 새로운 세상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내려진 여신들의 벌이자 저주라면, 절대 멈추지 않고 더 강하고 맹렬하게 그 벽에 온몸을 던질 거다. p.22
<페인트>, <셰이커>, <테스터>, <페이스> 등의 작품으로 SF와 판타지, 청소년 문학을 넘나들며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던 이희영 작가의 신작이다. 이 작품은 우리의 신화, 단군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새로운 판타지 세계를 보여준다. 인물들의 이름에서부터 짐작이 될 것이다. 베아(bear)와 타이(tiger)가 죽음의 숲 케이브(cave)에 들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베아가 곰족을, 전사 타이가 호랑이족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들어간 죽음의 숲 카이브는 동굴을 의미한다. 베아는 케이브에서 마늘꽃 열매만 먹고, 케이브를 빠져나온 후에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새 왕을 만난다. 피프족의 탄과 비스족의 쿤이 동맹을 맺으면 세상은 '탄쿤'이 다스리는 나라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단군설화>이지만 사실 이 작품은 모티브만 가져왔을 뿐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놀라운 상상력의 서사를 보여준다.
화려한 표지 일러스트에서도 느껴지듯이 주요 서사의 배경이 되는 숲 또한 매력적이다. 이곳은 죽음의 사신과 하늘에서 쫓겨난 악마들이 산다는 소문처럼 독특한 생명체들로 가득하다. 베아와 타이는 움직이는 나무, 반인 반어, 거대 백사, 늑대 등을 만나며 숱한 위기와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마늘꽃, 친절한 인어 님파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묘한 것들도 있다. 하늘까지 치솟은 나무들이 거대한 지붕처럼 온 숲을 뒤덮어 한낮에도 어두운 곳, 낯선 식물들이 자라며 회색과 검은색의 토끼들과 기묘한 날개를 지닌 새들이 사는 그곳에서 사라아에 반드시 다다르겠다는 베아의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예기치 못한 생명체를 만나며 숲을 지나면서 베아는 불안이 자신을 성장하게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베아의 용기로 인해 세상은 새로운 모습으로 건설될 것이고,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이다. 새로운 세대를 이끌 새 왕과 함께, 그 순간부터 또 다른 전설이 시작될 것이다. 자, 다양한 생명체들을 만날 수 있는 신비로운 숲 케이브로 지금 바로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