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에서 남편들이 내려와
홀리 그라마치오 지음, 김은영 옮김 / 북폴리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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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은 특별히 결혼을 원한 적도, 계획한 적도, 상상한 적도 없었다. 웨딩드레스 사진을 비밀 폴더에 넣어둔 적은 더더군다나 없었다. 아모스랑 사귈 때 잠깐 결혼을 원했지만 그건 결혼식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서, 마음을 정한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둘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헤어질까'가 아니라 '어떻게 해결할까'를 고민하고 싶었다. 엘레나가 약혼했을 때도 '나도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보다 '인생의 숙제를 하나 해치워서 좋겠다'고 생각했다.               p.136


로렌은 친구 엘레나의 결혼 축하 모임을 즐기고 도착한 집에서 낯선 남자와 마주친다. 경찰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하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잠금화면 속 사진이 그 낯선 남자와 자신이었다. 그러고보니 분명 자신의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인테리어가 달라져 있었다. 처음 보는 카펫에 소파의 색상이 바뀌었고, 책의 종류도, 꽂힌 위치도 모두 달랐다. 게다가 자신의 결혼사진까지 있었다. 낯선 남자는 바로 그녀의 남편이었던 거다. 자신이 취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딱히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미혼의 로렌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다음 날 잠에서 깼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휴대폰의 사진첩에는 자신이 그 남자와 찍은 사진들로 가득했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연락해 보지만 모두들 자신이 결혼해서 그 남자와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사실이 자신이 결혼을 했고, 남편이 있으며, 그 남편이 지금 자신의 집에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남편이 다락방에 올라갔다 내려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남편이라며 또 등장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바뀔 때마다 인테리어부터 시작해 로렌의 직업과 재정 상태 등 삶 전체가 완전히 달라졌다. 남편이 어디에서 오는지, 얼마나 많은지, 이런 일이 벌어지는 원인은 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로렌은 그저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남편들은 국적도, 인종도, 직업도, 성격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다락방에서 내려오자마자 바로 올려 보낸 남편도 있는가 하면 평생 함께하고픈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남편을 계속 바꾸며 재구성되는 인생의 끝엔 뭐가 있는 걸까.





관계가 시작될 무렵,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람을 부드럽게 만드는 순간이 있다. 마치 밀랍을 따뜻한 방 안에 놓으면 말랑해지는 것처럼.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조금씩 변해간다. 밀랍은 말랑말랑해지면서 삐죽삐죽 튀어나온 부분이 들어가고 조금씩 한 덩어리가 된다. 하지만 서서히 덩어리에 구멍이 생긴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여러 남편들과 지난 6개월의 시간을 보내며 말랑해지는 순간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새로운 남편이 등장하면 그에게 자신을 맞추거나 아예 돌려보내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엔 최선을 다해 노력 중이었다. 자신이 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삶이 더 나아진다고 느꼈다.            p.301~302


'끝없이 남편을 만들어내는 다락방’이라는 기발한 설정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200명 이상의 남편을 바꾸며 산다는 것이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지만,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자연스럽게 빠져들어 공감하고, 웃음을 터뜨리게 되었다. 수없이 바뀌는 남편에 따라 재구성되는 로렌의 인생이 특히나 관전 포인트였다. 구청에서 근무하다, 대형 철물점 겸 정원용품점에서 관리직으로 일하기도 하고, 살면서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한 값비싼 옷들이 가득 걸려 있는 부유한 집에서 비밀번호를 몰라 쩔쩔 매기도 한다. 모두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혀 모른 채 낯선 환경에 던져저서 갑자기 적응하며 하루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간 관계와 마주하게 되기도 하고,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곤란한 상황도 생긴다. 그럴 때마다 새로운 남편을 불러내 새로운 생을 시작하기 위해,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 남편을 다락방으로 보내기 위해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모든 상황들이 코믹하고 재미있으면서도, 긴장감 넘치고 스릴감이 가득했다. 


이 작품은 게임 디자이너인 홀리 그라마치오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이다. 작가가 게임 디자이너 출신이라 그런지 캐릭터 설정과 상상력에 있어서 독보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작품이다. 판타지적인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현실적인 디테일이 살아 있는 이야기였고, 결혼과 부부 관계에 대해서 유쾌하면서도 통찰력있는 시선을 보여주고 있어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다. 새로운 삶을 거듭해서 겪게 되는 것이 재미있어 보이다가도, 이렇게 남편을 계속 바꿔 가며 사는 게 과연 좋은 걸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내 마음대로 남편을 바꿔 가며 살 수 있다면 어떨까? 연애와 결혼의 의미는 무엇일까? 운명의 상대라는 건 우연인 걸까, 수많은 나의 욕망과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것일까? 로렌은 다락방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애쓰지만,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로렌은 자신이 어떤 남편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남편을 바꿔오며 생각한다. 완벽한 남편이란 누구이며, 자신에게 잘 맞는 남편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기발한 스토리를 통해 현실 속 인간 관계와 끝없는 선택의 세계를 돌아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남녀 관계를 단 한 권의 소설을 통해 만나보고 싶다면, 웃기고 재미있고 중독성있는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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