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과 열정의 시대 - 일제강점기 장르 단편선
곽재식 외 지음 / 구픽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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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은 서로 큰 피해를 입은 척하면서도 서로 상대방이 큰 성과를 내고 있다고 믿도록 맞춰 주고 있었다. 그것은 장기를 두다가 자기가 지면 울고불고 화를 내는 어린애와 탈 없이 놀아 주기 위해서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일부러 실수한 척하면서 져 주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단, 정영재의 정보에 대해서는 양쪽이 모두 화를 내는 어린애면서 동시에 져 주는 할아버지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렇게 오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관여시키며 계속될 수 있었을까?                 - 곽재식, '정직한 첩보원' 중에서, p.27



일제강점기 말기, 지하광복단과 총독부 사이를 오가며 이중스파이 역할을 했던 인물이 있다. 부모는 조선인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정영재는 총독부의 지부장에게는 조선인들의 비밀 조직에 스며들겠다는 목적으로, 지하광복단의 단원들에게는 총독부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목적으로 접근한다. 그가 양쪽에서 이야기하는 수려한 언변을 듣다 보면 조선 광복을 위해 싸우는 사람인지, 총독부의 앞잡이인지 헷갈릴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그가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방식이 매우 정직하다는 점도 흥미롭다. 지하광복단에는 자신이 총독부 소속이라고 대놓고 말했고, 총독부에는 자신이 지하광복단 사람들과 교류하는 사이라고 대놓고 말한 뒤, 양쪽에서 미끼로 넘길 만한 정보들을 얻어 서로에게 넘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자, 정영재의 가짜 정직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양측에서 정영재의 실체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나오지만 무사히 위기를 넘기고, 가짜 정보와 가짜 싸움은 더 이어진다. 지하광복단 멤버 중에서 정영재를 수상하다고 여겼던 홍춘화는 의심을 밝힐 증거를 찾아내지만, 정영재는 발뺌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수법에 대해서 그녀에게 아주 세세히 알려준다. 이번에도 그는 '정직'이라는 수단으로 대응한 것이다. 그 결과 홍춘화는 정영재와 같은 편이 되어 행동을 하며 살기로 하고, 정영재의 수법은 훨씬 더 탄탄해진다. 만화같은 설정인데, 이상하게 설득력있는 이야기였다. 짧은 분량이지만 아주 임팩트 있는 작품 <정직한 첩보원>이다. 곽재식 작가에 의하면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실화를 토대로 쓰인 이야기라고 하니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상상하며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누구십니까?"

한여름에도 덥지 않은지 친친 목을 두른 쪽빛 비단 목도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검은 셔츠와 바지에 군화, 손엔 계절에 맞지 않은 가죽 장갑까지. 딱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 돌아섰다. 노을빛을 가린 몸이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그러다 맥고 모자 밑으로 드러난 눈을 본 순간 월매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사람이 아니다!'

뒷걸음친 만큼 그것이 다가왔다. 월매는 붉은빛에 드러난 얼굴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 배명은, '호열자 손님' 중에서, p.109


이선의 삶은 혼인 후 그지없이 외롭게 되었다. 시어머니가 도맡아 하는 장사도 잘 되어 있었고, 친정에 살던 때보다 형편도 훨씬 나아졌으나 마음만은 한겨울 구멍이 숭숭 뚫린 창호 문 같았다.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남편은 신혼 때부터 이선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첩도 세 명이나 잇달아 두었고, 장사에도 열심이지 않았고, 가정에도 소홀했던 그는 한겨울에 술을 먹고 결국 노상에서 얼어 죽고 만다. 시어머니는 이선에게 사내 잡아먹은 요망한 년이라고 머리채를 잡고 종로통에 그녀를 패대기 쳐버린다. 그렇게 흠씬 두들겨 맞으면서도 울지 않았던 이선은 외려 등허리가 시원하다고 생각한다. 이후 우연한 계기로 흡혈귀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데, 영원히 늙지 않게 된 대신 즐기지도 않았던 육식을 탐하게 된 이선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이야기는 색다른 공포를 보여주는 최희라 작가의 <푸른 달빛은 혈관을 휘돌아 나가고>이다. 


책과 서점에 관한 SF, 팬데믹 시대의 로맨스, 귀신날 호러, 고전 SF오마주, 판소리 SF, 하드SF,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 등 다양한 장르소설 앤솔러지를 선보여온 있는 구픽의 앤솔러지 신작이다. 이번에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다섯 명의 소설가들이 쓴 각기 다른 장르의 단편소설 다섯 편을 만날 수 있다. 스릴러, 호러, 로맨스,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어 새로운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나 이 책의 수익금 일부가 한국해비타트의 독립유공자 후손 주거환경개선사업에 선기부되었다고 하니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통해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를 다양한 시각으로 만나보고, 과거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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