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바닥 - 제44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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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김, 정확하고 치밀한 사무 관리, 전문적인 법률 지식, 교섭 능력. 채권 회수는 일반적으로 은행원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이 평균 이상으로 요구되는 가혹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 그런 지저분한 일을 사카모토는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그저 담담히 해냄으로써 스스로와 균형을 맞춰왔다. 거친 교섭이 이어지면 마지막 날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으레 말이 없어졌다. 쾌활한 사람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온후하고 다정한 사람이 감정 없는 톱니바퀴로 변모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p.57


은행에서 근무하는 이기는 대출 고객을 방문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하다 동료인 사카모토를 만난다. 두 사람은 입사 동기로 이기는 일반 융자 담당, 사카모토는 회수 담당이었다. 사카모토는 이기에게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너 나한테 빚진 거다?"라는 묘한 소리를 남긴 채 자리를 떠나고, 몇 시간 뒤 시체로 발견된다. 게다가 고객의 계좌에서 돈을 인출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는데... 이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3천만 엔이라는 거액의 돈을 횡령했다니.. 자신이 알던 사카모토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인은 알레르기로 인한 쇼크사로 요요기 공원 옆에 있는 차 안에서 쓰러져 있는 채 발견되었다. 벌에 쏘인 자국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아마도 벌 알레르기였던 것 같다고 한다. 


그의 업무를 인계받은 이기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이었던 사카모토는 컴퓨터에 스케줄 프로그램에 꼼꼼히 하루 단위로 일정이 기록했다. 스케줄의 면담 기록 중 여러 장의 메모가 사라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알 수 없는 스케줄이 있었으며, 담당했던 회사의 계좌 잔고 추이를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점차 사카모토의 죽음이 알레르기로 인한 사고가 아니라 계획적인 타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살해당할 동기가 될 만한 것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었는데, 이거라면 그 동기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기는 동료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쳐 보기로 한다. 이미 한차례 좌천되어 온 지점이었지만, 이러다가는 은행에서 쫓겨날 수도 있겠다는 말까지 듣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상도 하지 못한 진실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한다. 





"죽었다니 무슨 소리야."

그 눈을 직시했다. 깊은 눈동자다. 뭐가 있지? 분노, 당혹, 두려움, 긍지 그리고 혼란......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 

그 직감에 나는 동요했다.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을 사고가 경로에서 벗어난다. 이 사건에서 그녀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그것을 모르게 되었다. 니시나의 시선이 쏘아보는 가운데 맹렬한 기세로 머리를 회전시켰다. 가설을 다시 세운다. 손에서 빠져나간 진실을 붙잡으려고 몸부림친다.                p.365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를 비롯해서, <변두리 로켓> 시리즈와 <일곱 개의 회의>, <루스벨트 게임>, <하늘을 나는 타이어> 등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직장인들의 통쾌한 반란과 도전을 탄탄한 구성과 생생한 캐릭터로 그려냈었던 이케이도 준의 데뷔작이다. 그는 은행원으로 일하다 퇴사한 뒤 이 소설로 제44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케이도 준의 출발점에 놓여 있는 작품이자, 은행 미스터리의 탄생을 선언하는 작품이기도 한데, 본격적인 기업소설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살인사건을 풀어 나가는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도 선사하고 있어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이케이도 준은 자신이 근무했던 은행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도산과 그와 관련된 여러 사건을 모티프로 했음을 밝히면서 “쓰고 싶어서 썼다기보다는 기필코 써야만 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뉴스에 숱하게 보도되는 사건의 그 이면을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기존에 만났던 그의 작품들이 기본적인 구도는 영세한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맞서 싸우는 식이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형식으로 진행되어 색다른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은행과 기업이 얽힌 음모, 은행 안의 복잡한 파벌 싸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불의도 불사하는 비열한 상사... 등 현실감 넘치는 전개와 탄탄한 구성으로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케이도 준의 여느 작품들이 그랬던 것처럼 군더더기 없이 가독성이 뛰어나다.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진짜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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