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거대한 서점, 진보초
박순주 지음 / 정은문고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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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늘어선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걷다가 스즈란 거리 끝자락에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오래된 건축물을 만난다. 서점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새초롬한 노란 눈의 고양이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겨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자 알록달록 귀여운 잡화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황홀경에 빠져 정신없이 매대 구경에 나선다. 아기자기한 인형과 빈티지한 인테리어 소품이 한가득이라 들뜬 기분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이것이 진보초의 첫 산책자가 분포도를 마주하는 장면이지 않으려나.              p.51


진보초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마을과도 같은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책 마을이자, 세계 최고의 책 거리라 불릴 만한 서점 수와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니 말이다. 거리의 서점 한 곳 한 곳이 거대한 서가가 되고, 골목길은 서가에서 서가로 이동하는 통로가 되어주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애서가들의 천국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 최초의 서점이 1877년에 생겼다고 하니, 자그마치 147년의 역사를 가진 곳이다. 




이 책은 진보초에 위치한 유서 깊은 서점과 최근 생겨난 젊은 서점 등 18곳을 찾아가 서점주들을 인터뷰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진보초 고서점 거리에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서점이 수두룩한데, 시간을 취급하는 대형 서점을 비롯해 고서 전문, 영화와 연극 서적을 다루거나 특정 나라의 책들을 만날 수 있는 전문점들이 조화롭게 운영되고 있다. 서점마다 각자 영역이 달라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는 점도 인상적이었고, 자신만의 개성과 매력으로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흥미로웠다. 이곳에는 170여 개의 서점과 240여 개의 출판사, 그리고 잡지사, 인쇄소 등이 모여있어 책의 제작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책이 탄생하게 되는 전 과정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2대 이상 이어오는 진보초 고서점 대표와 인터뷰를 할 때면 종종 '수행'이란 단어가 귀에 꽂힌다. 뭔가 대단한 일을 갈고닦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그렇게 거창한 의미는 아니다. 서점은 보통 매장에 진열된 책으로 자기 색깔을 드러낸다. 게다가 역사 깊은 전문점일수록 색깔이 짙기 마련이라,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뭐가 대표 분야인지 한눈에 읽힌다. 그 뒤에는 서점 특색을 고려해 책장이나 매대 구성에 수고를 아끼지 않는 베테랑 직원의 한결같은 손길이 존재한다. 문제는 담당 서가를 꼼꼼히 관리하고 손님을 친절히 맞이하는 자세를 단기간에 익히지 못한다는 것. 한마디로 오랜 기간에 걸쳐 쌓은 결과물이다.             p.129


다양한 서점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그 중에서도 월 임대료 5,500엔만 내면 누구나 손쉽게 책장 주인이 될 수 있는 서점 '파사주 바이 올 리뷰스'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이 서점에는 저마다 자신이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한 책과 취미로 수집한 소장품들을 만날 수 있는데, 개중에는 작고한 작가 사인이 담긴 책부터 지금은 절판된 고서에 이르기까지 희귀본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책장 하나를 빌려 주인으로서 책을 구비하고 재고를 관리하고 SNS로 홍보하고 오프라인에서 판매를 한다는 시스템자체도 흥미로웠고, 그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특별한 책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라 독자 입장에서 방문하더라도 대단한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꿈꾸었을 책방 주인이라는 꿈을 실현시켜주는 곳이기도 해서 언젠가 진보초에 가게 된다면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전국 지방 출판사와 소규모 출판사가 펴낸 서적을 한곳에 모아놓은 곳도 있었고, 아기자기한 인형과 빈티지한 인테리어 소품이 가득한 곳도 있으며,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미니어처 크기의 콩책을 판매하는 서점도 있고, 동물과 식물에 관한 책들을 만날 수 있는 자연이 가득한 서점도 있었으며, 동화책과 그림책, 아동 연구서가 모여 있는 어린이 전문 고서점도 있다. 일본에 살며 일본 희곡 번역을 하는 저자는 일본어를 전혀 몰라도 진보초 고서점 거리를 구경할 수 있는 꿀팁도 알려 준다. 초급, 중급, 상급, 최최상급으로 등급별 방문하기 노하우가 수록되어 있으니 진보초에 방문할 예정이라면 놓치지 말자. 아주 오래 전에는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면 종이 북커버를 씌워주곤 했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문화이지만, 진보초의 서점에서는 아직도 북커버를 해주는 곳이 많다고 한다. 저마다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는 멋지고 개성 넘치는 북커버로 씌워준다고 하니 너무 궁금해진다. 어느 곳은 진보초 지도로, 어느 곳은 윌리엄 모리스 패턴으로, 또 어느 곳은 초록바탕에 금색 테두리를 그린 고풍스러움으로, 또 다른 곳은 오랜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이는 표기로 책을 사는 즐거움에 보는 재미까지 더해준다고 하니 말이다. 오감을 가진 종이책의 물성을 좋아한다면, 서점이라는 공간만이 줄 수 있는 그 분위기를 사랑한다면, 이 책은 꼭 만나보길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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