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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한원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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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윈터 홀의 머릿속에 별안간 기막힌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너무 기발하고 터무니없다시피 해서 그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생각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선생은 참으로 윤리적인 사람이군요." 그가 입을 뗐다. "일종의 ...... 도덕광이라고 할까요."
"도덕에 환장했다고 할 수 있지." 드라고밀로프가 유쾌하게 대꾸했다. "맞아, 내겐 그런 경향이 있지."
"옳다고 여기는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하시겠군요." p.59
부패한 노동조합 간부, 리틀 경찰서장, 거물급 후원자, 목화 왕, 세철리 조사관 등 권력과 부패의 정점에 있던 사회계 인사들이 차례로 변을 당한다. 그리고 그 사건들 뒤에는 무시무시한 암살주식회사가 있었다. 암살국의 수장인 드라고밀로프는 죽어 마땅한 악인을 법의 테두리 밖에서 처단하는 일을 한다. 왕부터 가난한 농민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어떤 의뢰든 받지만, 그 전에 조사를 통해 사회적으로 그 죽음이 정당하다는 결론이 나와야만 처리가 가능하다는 것이 유일한 규칙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암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백만장자 청년 윈터 홀이 나타나 자신에 대한 암살 의뢰를 하고, 그가 제시하는 도덕적 근거에 설득당한 드라고밀로프는 암살국 해체뿐만 아니라 그곳의 수장인 자기 자신 또한 제거되어야 옳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하필 윈터 홀은 드라고밀로프의 딸인 그루냐 콘스탄틴의 애인이기도 했다. 그루냐는 자신을 삼촌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의 딸이라는 사실을 비롯해 앞으로 자신의 딸을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건네며 드라고밀로프는 홀에게 뒷일을 맡긴다. 하루아침에 암살 표적이 되어 조직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그는 자신만만한데, 직접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는 그는 대체 뭘 믿고 이 일을 수락한 것일까. 자, 과연 조직이 창조자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창조자가 그보다 한 수 앞서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야기는 점점 더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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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그루냐." 드라고밀로프가 애원했다. "아름다운 광기가 아니더냐? 꼭 광기라는 단어를 고집한다면 말이다. 여기에서는 사유와 도덕이 지배한단다. 내 눈에는 그게 가장 고결한 합리이자 통제로 보이는구나. 사람이 하등동물과 다른 점은 통제력이야. 지금 이 상황만 해도 그렇잖니. 저기 날 죽이려고 하는 일곱 명의 사내들이 있어. 여기엔 저들을 죽이려는 내가 있고. 하지만 대화라는 기적을 통해 우리는 휴전에 합의했다. 신뢰하는 거지. 고결한 도덕적 통제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예시가 아니겠니?" p.181~182
<야성의 부름>으로 잘 알려진 작가 잭 런던의 미발표 유작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잭 런던이 1910년 3월 11일 당시 무명 작가였던 싱클레어 루이스(193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에게 70달러를 주고 사들인 열네 개의 이야기 개요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는 2만 단어 분량의 내용을 쓴 뒤 1910년 6월 말 소설의 결말을 논리적으로 끝맺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집필을 중단했다. 전체 286페이지인 이 작품에서 잭 런던의 원고는 198페이지의 중반 이후에서 멈춘다. 그리고 이 작품은 1963년 가을, 추리소설가인 로버트 L.피시가 뒤를 이어 마무리해서 출간이 되었다. 하지만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잭 런던이 남긴 메모’와 ‘차미언 런던(런던의 두번째 아내)이 구상한 결말’이 함께 수록되어 미완성 결말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의 여지를 남겨준다.
'법의 테두리 밖에서 악인을 처단하는 것은 정의구현인가, 또다른 범죄인가'에 대한 문제를 이렇게 오래 전에도 작품 속에서 고민했었다는 점도 흥미롭고,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소설가이자 대중잡지 소설 황금기의 개척자 잭 런던조차 그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점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세상에서 가장 철학적인 킬러들이 등장하는 색다른 고전 문학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