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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루프 ㅣ 창비교육 성장소설 11
박서련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4월
평점 :
오랜만에 학교에 가면서 솔직히 이런 기대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품고 있었다. 그래도 어쩌면 한두 명쯤은, 도대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봐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죄다 말해 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지만, 누가 물어만 봐 주면 그거 다 오해라고 하면서 우는 모습 정도는 보여 줄 생각이었다. 딱 한 명만 내게 말을 걸어 준다면 나는 그 앞에서 울어 줄 수 있고, 울고 나면 분위기가 바뀔 거라고. 적어도 우리 반만은. 우리 학교만은. 우리 동네만은. - '솔직한 마음' 중에서, p.24
6인조 아이돌 그룹에서 막내였던 나는 자신이 원래부터 사랑받게끔 타고난 사람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인기있는 그룹은 아니었지만 팬층은 나름대로 돈독해서 그럭저럭 팔리는 걸 그룹이었고, 막내라는 포지션 또한 못해도 중간은 가는 편이라 편했고 말이다. 그런데 한 달 전, 메인 보컬 언니가 그룹 내 왕따 폭로 글을 올리고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우리 그룹에 무슨 왕따가 있느냐는 생각부터 들었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지만, 가만이 있던 자신가지 덩달아 방관자, 가해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모든 인터넷 언론사가 기사를 냈고, 팬은 꽤 있지만 안티는 없었던 그들 그룹은 그야말로 국민 왕따가 되어서 망했다. 그렇게 돌아온 학교 생활 역시 편할 수 없었다. 아무도 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봐 주지 않았고, 그저 보도된 대로 그룹 내 멤버를 왕따시킨 가해자로 학습 내 왕따가 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원래 왕따'였던 원따와 친구가 되어 보고자 하지만, 그것조차 결코 쉽지 않다.
이 책에는 친구를 사귀고 싶은 아이돌 소녀의 고군분투기외에도, 다양한 상황에 놓인 소녀들의 성장기가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는 표제작이기도 한 <고-백-루-프>를 흥미롭게 읽었다. 모두의 선망을 받는 1학년 보컬 우지현이 현지에게 축제 전야제에 오라고 초대를 한다. 자신의 노래를 들으러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지현을 보며 현지는 생각한다.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진짜 고백을 하려는 거, 아니면 그냥 엿 먹이는거. 그래서 축제 전야제에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 중이다. 애초에 사람 많고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고, 누가 가요제에서 우승하든 내 관심사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망설이다 지현의 초대를 외면하고 하교를 해 버린 다음 날, 현지에게 어제와 똑같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고, 오늘의 날짜가 어제랑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정한 하루가 구간 반복되는 상황, 소위 '루프'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루프 속에서 현지는 지현을 진심과 자신의 마음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게다가 알고 보니 일상은 엄청나게 불확실하고 예상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반복되는 루프를 겪으며 깨닫게 된 것이다. 풋풋하고, 귀여운 이야기였다.
내가 겪은 불가사의한 루프를 비밀로 하는 건 쉬웠다. 설명하려고 노력해 봤자 이해 못 할 게 뻔하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가능하면 바로 지금,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 내가 어떤 시간들을 통과해 왔는지를 우지현이 이해해 줬으면 했다. 대답 대신 그 시간들을 내밀고 싶다는 충동이 자꾸 튀어나왔다. 나는 숨을 고르고 우지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지현이 좋아하는 작고 하얀손. 내가 싫어하는 통통하고 손마디 굴은 손.
"앞으로 잘 부탁해." - '고-백-루-프' 중에서,
<체공녀 강주룡>, <더 셜리 클럽>,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등의 작품으로 만나온 박서련 작가의 첫 청소년소설집이다. 작가가 등단 후 창작한 청소년소설 다섯 편과 청소년 시절 쓴 소설 두 편이 각 작품의 창작 후기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청소년은 소설을 쓸 수 있고, 소설 쓰던 청소년이 결국 소설가가 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을 읽으며 그 시절의 작가를 상상해 본다. 야간 자습 시간에 연필로 소설을 쓰고 집에 가서는 그걸 컴퓨터에 옮긴 후 밤새 이어 가며 소설을 썼던 청소년 시절이 있었기에, 한겨레문학상,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믿고 보는 작가로 사랑받는 지금의 모습이 있는 것일테니 말이다.
친구를 사귀고 싶은 아이돌 소녀의 이야기, 폐업을 앞둔 극장 매표소를 지키며 고향에서 벗어나고픈 소녀의 이야기, 타임루프에 갇히게 되면서 자신의 마음과 친구의 고백을 확인하는 소녀의 이야기 등 청소년들이 고민하고, 겪고 있을 법한 상황들이 다채로운 상황 속에서 그려지고 있다. 무한대로 확장하는 상상력을 통해서 SF적인 설정이 가미된 스토리도 있었고, 타임루프라는 장치를 사용한 이야기도 있었으며, 가족들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현실적인 작품도 있었다. 박서련 작가가 그 동안 여러 작품에서 보여준 여성들의 서사들이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탄생하게 되었구나 싶은 작품들도 있었다. 작가는 아직 소설을 써 본 적 없는 어떤 청소년이 이 작품들을 보고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더욱 더 청소년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조금은 서툴지만 그 부족함이 미래로 향하는 더 큰 발걸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가득찬 청소년들의 세계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