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과 정전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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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등장했던 모든 마술을 능가하는' 마술은 이 단계에서는 '거대한 장치'라는 복선만 깔려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나를 포함한 관객은 이미 리도의 '연출'이라는 마법에 걸려 있다. 존재하지 않는 '금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그에 도전하는 마술사로서 리도가 지금부터 무엇을 할지 기대하고 있다... 사실 내가 가장 감동한 마술은 이 오프닝이었다. 리도는 복선을 깔고 관객에게 마법을 걸어 더없이 주도면밀하게 앞으로 일어날 기적을 준비한 것이다.          - '마술사' 중에서, p.17



한때 마술계의 스타였던 인기 마술사 '다케무라 리도'는 마술단을 운영하며 자금난에 시달렸고,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마저 실패하면서 빚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무대에서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순 없을까' 고민하다 타임머신을 만들었다며,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가는 기적의 트릭을 선보인 뒤 자취를 감춰버린다. 한동안 그의 행방을 둘러싸고 텔레비전이 시끌시끌했지만, 시간이 흘러 곧 리도는 지나간 과거가 된다. 22년 뒤, 역시 마술사가 된 리도의 딸은 오랜 시간 아버지의 마지막 마술을 연구해왔으며 드디어 그의 타임머신을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를 구하기 위해 한 번 더 시간 여행을 하겠다고 공언하는데, 과연 그녀는 서른한 살 때의 아버지를 만나 그의 타임머신 초연을 막을 수 있을까. 


음악이 화폐로 통용되며 재산이자 학문으로 여겨지는 섬이 있다. 델카바오라는 작은 섬에 사는 루테아족은 필리핀 정부와 유네스코에서 C급 특정 문화 보호구역으로 지정한 소수 민족이다. 그들은 각각 '음악'을 소유하는데, 그들이 소유하는 음악은 자기가 지은 것과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 다른 음악이나 토지, 가축 등과 교환해 입수한 것이다. 그들은 음악을 '화폐'와 '재산'으로 나누어 관리하는데, '화폐'로서의 음악은 소유하는 곡을 그 자리에서 연주해 사용하고, '재산'으로서의 음악은 그것을 소유하는 이의 지위도 되고 '화폐'의 가치와도 연관된다. 너무 자주 연주하면 '재산'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가치가 높을 수록 좀처럼 연주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는데, 루테아족의 가장 유복한 남자가 소유한 부족 역사상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음악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연주된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음악을 듣기 위해 델카바오 섬에 간 '나'는 과연 한 번도 연주된 적 없는 그 음악을 찾을 수 있을까.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지국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바꿔 말해서 백삼십 년 전으로 CIA 정보원을 보내 공산주의가 탄생하는 걸 막는 겁니다.”

“그런 짓을 하면 세계는 어떻게 되는데?”

“모릅니다.” 화이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쩌면 제 존재도 사라질지 모르죠.             - '거짓과 정전' 중에서, p.280


이 작품은 미야베 미유키가 'SF계에서 초신성이 나타났다.'고 평가한 작가 오가와 사토시의 첫 번째 SF 단편집이다. '시간'과 '역사'를 테마로 여섯 편의 단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타임머신 마술의 비밀,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경주마에 얽힌 인연, 그리고 CIA에 협력하는 소련 과학자의 특별한 기술 등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형식도, 소재도, 배경도 낯설고 참신한 작품이었다. 오가와 사토시는 불가능 범죄를 미스터리로 풀어내는 <너의 퀴즈>라는 작품으로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SF장르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 동안 다섯 작품을 발표하며 작품마다 파격적이고도 정치한 상상력으로 호평을 받아왔는데, 이번 작품 역시 독특한 오가와 사토시만의 상상력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출간 인터뷰에서 'SF의 재미는 지금의 현실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 또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자명하다고 생각되는 가치관이 붕괴되는 듯한 감각을 맛보는 데 있다고' 말했다. 당연한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을 때, 보편적인 가치가 무너지고 그 세계만의 특별한 가치가 모든 평범한 기준들을 넘어설 때 느낄 수 있는 재미야말로 오가와 사토시의 작품이 주는 재미인 것이다.  시간과 역사라는 소재로 쓰여진 이번 다섯 작품 역시 마술, 경마, 음악, 아라비안 나이트, 공산주의 등 어떤 공통점도 없는 다채로운 장르로 선보이고 있는데, 그 낯선 감각이 주는 매력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 한계 없는 상상력으로 버무려진 색다른 SF 작품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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