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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잠든 사이에
스테이시 에이브럼스 지음, 권도희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평점 :
에이버리는 놀라지 않았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 사람은 자기가 죽을 거라고 했어요." 재러드가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 "날 도우려고 했는데 일이 복잡해졌다면서요."
복잡해졌다? 그 합병을 허용하기 위해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내는 일은 그저 복잡한 정도가 아니지 않는가. 에이버리는 신랄하게 생각했다. 그건 탄핵의 근거이며,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법원 판결의 상황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했던 것처럼. p.165
'국민의 대변인'이라 불리는 대법관 하워드 윈은 업무 능력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재선을 준비 중인 현대통령과 대놓고 대립 중이면서 나라 전체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사건을 조사하던 중이었다. 최근 대통령이 막내딸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대학의 졸업식에서 한 연설로 인해 언론을 들썩이게 만들었는데, 언론에서는 윈 대법관이 앞으로 <미친 판사>라는 리얼리티 쇼를 보여주진 않을지 궁금하다며 대놓고 비꼬기도 한다. 윈은 늘 혼자였다. 첫 번째 아내는 죽었고, 두 번째 아내와는 이혼 소송 중이었으며 하나뿐인 아들은 아버지를 경멸했다. 그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걱정하는 척하는 아첨꾼들과 멸시당해도 산 인간들만 모여 있는 법원도 역시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하워드 윈이 혼수상태에 빠진 채 간병인에게 발견되고, 그의 법적 후견인으로 자신의 서기로 일하는 에이버리 킨을 지명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아버지는 사고로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는 마약 중독자에, 가진 돈도, 연줄도 없는 에이버리 킨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세간에서는 킨이 대법관과 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단연코 아무런 일도 없었던 데다 그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편애한다고 느낄 법한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의식이 없는 대법관은 킨을 위해 숨겨진 단서들을 곳곳에 숨겨 두었는데,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풀면서 자신을 몰아내려는 세력에 맞서야 했다. 그녀는 윈 대법관이 나라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 중 하나인 미국 생명과학 회사와 인도 유전학 회사 간의 합병 제안을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사실 이 문제는 정치적 문제와 국제적 음모가 함께 어우러진 복잡한 사안이었다. 과연 킨은 대법관이 남겨놓은 비밀들을 무사히 찾아내 그를 구해낼 수 있을까.
에이버리는 리타와 윈 대법관, 양쪽 모두를 잃을 수 없었다. 두 사람 다 구해야 해. 바로 그 순간 갑자기 해결책이 떠올랐다. 에이버리는 또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에는 단호하고, 안정적이었다.
"방법이 있어요." 그녀는 위협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윈 대법관이 에이버리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녀가 책으로 배운 지식만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이버리는 경험도 많았다. 그래서 쉽게 겁을 먹지 않았다. 여전히 목을 조르고 있는 위협을 옆으로 밀어내며, 에이버리가 중얼거렸다. "나한텐 문서가 있잖아요. 영향력도 있고." p.440
요즘은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의 책을 몰입감있게 읽기가 힘들다. 워낙 읽을 책이 많아 병렬독서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매력적인 작품이 별로 없는 탓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된 스릴러 작품을 만났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도저히 중간에 다른 책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속도감있고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 스테이시 에이브럼스는 예일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조지아 하원의원과 소수당 대표를 역임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필명으로 여덟 권의 로맨스 소설을 썼는데 이번 작품이 자신의 실명으로 출간한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정치와 법조계를 거쳐온 자신의 이력을 잘 살린 작품이라 굉장히 현실적이고 시의성있는 이야기를 탄탄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의 장점을 얘기하자면, 탄탄한 플롯과 속도감 있는 전개, 시의성 있는 주제와 현실감 넘치는 배경 등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돋보이는 것은 캐릭터이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고 입체감있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에이버리 킨은 영리하고 침착하고, 사진같인 기억력을 가지고 있으며 신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조차 옳고 그름을 판단해 행동할 수 있는 대범함과 치밀하게 짜여진 단서들을 풀어나가는 신중함도 가지고 있다. 반가운 소식은 후속작이 2023년 여름에 출간되었고, 작가가 현재 세 번째 이야기를 집필 중이라는 거다. 그녀의 새로운 활약과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로서의 재미 또한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정의는 어디에나 있지만 보기 힘든 세상,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질 위기에 처해서도 오직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위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는 여성 캐릭터의 탄생을 놓치지 말자. 군더더기 없는 속도감으로 휘몰아치는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잘 만들어진 스릴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