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정지아 외 지음, 이제창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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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참 다행이지 않냐?"

"뭐가요?"

"네가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기와 저기, 또 우리와 우리가 아닌 것들을 가르는 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 박상영, '요즘 애들' 중에서, p.89


카페에 앉아 있는 한 남자는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 없었고, 자신이 누구인지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기억 상실이라니, 아침 드라마나 주말 드라마의 가장 식상한 소재가 자신의 현실이 된 것이다. 이상한 것은 커피나 커피 잔, 디자인 의자와 소파 등에 대해서는 자신이 확실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정도 커피라면 자신의 단골 카페일 거라 생각하고 직원에게 자신에 대해 질문을 해보지만 별로 쓸만한 정보를 찾아내진 못한다. 결국 경찰서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의 지문이 등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이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일 거라는 추측을 시작으로 이런 저런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자신의 집을 찾아가게 된다. 물론 여전히 자신에 대한 기억은 사라진 채로 말이다. 정지아 작가의 <존재의 증명>은 그렇게 기억을 잃어 버리고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정소현 작가의 <엔터 샌드맨>에서는 폭발 사고로 무너져 내린 건물에 깔렸다가 구조되어 살아남은 여자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친구와 함께 며칠을 그 속에서 버텼는데, 결국 구조된 건 자신 혼자였고, 친구는 죽고 말았다.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트라우마와 방황은 결혼을 하고,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잔해 속에서 구출을 기다리며 함께 불렀던 노래, 엔터 샌드맨. 그녀는 현실을 외면하고 점점 자신만의 세상에 틀어 박혀 살기 시작한다. 그리고 헤어진 남편이자 사고에서 함께 살아 남았던 지훈의 이상한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사고 이후 처음으로 아주 명징하고 단단한 고통을 느낀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뾰족하게 돋아 올라 온몸으로 가지를 뻗어 가다가 눈을 예리하게 뚫고 올라오는 통증을 느끼며, 서서히 진짜 세상 속으로 걸어 나올 준비를 시작한다. 





그런 날이 정말 있었는지, 그가 정말 있었던 게 맞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잔해 더미 속에 엎드린 채로 꾸는 꿈이 아닐까, 은하도 지훈도 둘과 함께 있던 세계도 모두 헛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둘이 함께 나누던 사소한 농담, 둘이 먹던 형편없는 식사, 둘이 앉아서 졸곤 했던 낡은 가죽 소파, 그가 좋아했던 부드러운 무릎 담요를 떠올렸다. 그것은 그녀가 유일하게 속해 있던 아주 사소하고 구체적인 세계였다. 지수는 그 세계가 정말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동시에 영원히 잃어버렸다.          - 정소현, '엔터 샌드맨' 중에서, p.127


창비교육의 테마 소설 시리즈 신작이다. 이 시리즈는 현직 교사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제자들을 걱정하며, 앞으로의 사회생활에 지표가 되어 줄 작품들을 선별해서 엮어 왔다. '우정'을 소재로 함께 걷는 소설, '가족'을 소재로 끌어 안는 소설, '노동'을 주제로 땀 흘리는 소설, '이별'을 주제로 손 흔 드는 소설 '재난'을 테마로 기억하는 소설, '환경'을 테마로 숨 쉬는 소설 등 다양한 작품들이 나왔다. 이번에 나온 <방황하는 소설>은 시리즈 열한 번째 책으로 '방황'을 테마로 한 7편의 단편 소설을 묶었다. 정지아, 박상영, 정소현, 김금희, 김지연, 박민정, 최은영 작가가 그려 낸 이야기들은 각각 처해있는 상황도 다르고, 나이대도 다양하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죽을 것 같이 아프고 힘들어도 세상은 여전히 잘만 돌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세상은 변함없이 그대로이고, 달라지는 건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이유로든 누구나 살면서 방황을 하게 마련이고, 방황하는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 버리거나, 사회에 처음 나와 방황하기도 하고, 트라우마나, 인간관계에 대한 방황 등 각자의 상황은 다르더라도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서 방황하고, 헤매고, 실패하고, 고통받으며 조금씩 오늘을 살아간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이미 다른 지면을 통해서 발표가 되었던 소설들이라, 처음 만나는 작품도 있었지만 이미 읽었던 이야기들도 많았다. 하지만 분명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느 때 읽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또한 소설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앤솔로지 형태로 묶인 테마 소설 시리즈가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일곱 편의 이야기 중에서 내가 거쳐 온 방황의 모습과 닮은 이야기가 분명 한 편쯤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이야기가 삶의 방향을 찾아 방황하는 당신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주기를 바래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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