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경계
야쿠마루 가쿠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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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 나서 그랬다. 상대는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나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범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와다의 대답을 듣자 온몸에 열이 확 솟구쳤다.

"아카리 씨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나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면 상대는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죽을 뻔했다니. 게다가 아카리를 구하려다가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범인은 아카리의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책감까지 안겨 준 셈이었다.         p.59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가득한 거리는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엄청난 인파로 가득했다. 20대 직장인 아카리는 생일을 맞이해 유명 레스토랑에서 남자 친구 코헤이와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며 약속을 취소 당한 참이다. 아카리는 속상한 마음에 그대로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가까운 케이크 가게에 가 보기로 한다. 마침 신호가 바뀌었고 수많은 인파가 일제히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문득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그렇게 무차별 흉기 난동 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만다. 그날 약속이 취소되지 않았다면, 그냥 집에 바로 가기만 했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해치는 범죄가 벌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끔찍하고 무서워졌다. 그날 이후 아카리의 세상은 색을 잃어 버린다.  


그 사건으로 한 남자가 죽고, 두 여자가 중상을 입게 된다. 아카리는 여러 군데 깊은 상처를 입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일주일 만에 겨우 깨어난다. 마지막 순간에 범인을 막아선 한 남자 덕분에 아카리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아카리를 구한 남자는 “약속은 지켰다고… 전해 줘….”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고 만다. 마지막에 남긴 그 한마디는 누구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이 작품은 묻지마 범죄의 피해자가 생명의 은인이 마지막 순간에 남긴 미스터리를 풀어 가는 과정과 가해자의 배경에 관심을 갖고 취재하는 기자의 시점을 교차로 진행하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특히나 자식을 낳아놓고 방치하거나 학대하는 부모의 이야기를 개인의 잘잘못을 넘어서 사회적인 문제로 해석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그들이 한 행동만 보자면 부모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사정도 모르면서 무조건 비난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사회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나는 일면식도 없는 범인한테 공격당해서 크게 다쳤잖아. 아키히로 씨는 목숨을 잃었고. 그런 일이 생기는 걸 보면 세상에 나랑 상관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 않나 싶더라."

"그야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일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아. 아카리 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으면 좋겠어."

아카리 역시 그런 무서운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p.308~309


사회파 추리의 강자 야쿠마루 가쿠의 신작이다. 매번 묵직한 미스터리를 그려내는 작가답게, 이번 작품에서도 묻지마 범죄를 시작으로 현대 사회의 병폐를 짚어 내고, 사건의 피해자와 그 주변인들이 겪게 되는 것들에 대해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묻지마 범죄는 여전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 중 누구라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사고로 인해 가족을 잃어 버리거나, 살 곳을 잃고 길거리에서 방황하거나,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상태가 되어 절망할 수도 있다. 이 작품 속에서는 그렇게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각자의 사정은 모두 다르지만, 모두 삶이 의미없어지고, 바닥까지 절망한 상태라는 점은 같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모두 달랐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탓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생을 비관하고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누구나 크든 작든 저마다의 불행을 안고 살아간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더라도,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랐더라도, 좋은 직업을 가지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더라도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반대로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고, 기본적인 교육도 없이 주위와 단절된 환경에서 학대 당하면서 살았다면, 물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범죄를 저질러도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그러한 환경이 다른 인생을 선택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죄의 경계를 넘지는 말아야 한다. 이 작품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아무런 이유 없이 범죄를 당한 피해자의 시점에서 각각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죄의 경계'에 대해서 담담하게 질문을 던진다.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낸 이 작품을 통해서 현대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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