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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훔치는 자는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3년 11월
평점 :
"미쿠라관의 책, 현재 23만 9,122권, 그 모든 책에 '책의 저주'가 걸려 있어. 훔치면, 미쿠라 집안사람이 아닌 자가 바깥으로 책을 한 권이라도 가지고 나가면 발동하지. 이야기를 훔친 자는 이야기의 감옥에 갇혀. 이번에 선택된 건 마술적 사실주의의 저주야. 매직 리얼리즘이라고도 불리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세계에 도둑이 갇히는 저주지."
p.51
모두 50곳의 책에 관련된 가게들이 자리하고 있는 요무나가마을은 책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시작은 거대 서고 '미쿠라관'이었는데,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책 수집가이자 평론가인 미쿠라 가이치의 개인 서고였다가 마을의 명소가 된 곳이다. 하지만 수백권의 희귀본을 도둑맞고 나서는 결국 미쿠라관은 폐쇄되었고, 미쿠라 집안사람 외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게 되고 만다. 지금은 두 세대를 거쳐 가족들이 관리하는 중이다. 미쿠라 집안의 손녀이지만, 고등학생인 미후유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 날 미후유는 아픈 아버지 대신 서고에 갔다가 기묘한 메모를 발견하게 되고, '이 책을 훔치는 자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깃발에 쫓기리라'는 문구와 함께 책 속 이야기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누군가 책을 훔쳤고, 그로 인해 책에 걸려 있던 저주가 발동해 마을 전체가 이야기의 세계로 바뀌게 된 것이다. 미후유는 그 속에서 책도둑을 찾아내야 했는데, 책을 싫어하는 주인공이 다양한 책의 세계에서 펼치는 모험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하드보일드의 세계에서 총에 맞을 뻔도 하고, 달려드는 은빛 짐승에게 쫓기거나 적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기도 하면서 책 도둑을 찾아 다니며, 책에 걸린 저주의 수수께끼에 대해 점점 다가가게 된다. 새하얀 운동화와 양말, 교복 차림의 앳된 얼굴을 하고는 기척도 없이 유령처럼 나타난 하얀 머리카락의 소녀 마시로와 함께 책의 세계에 들어간 미후유가 경험하는 세상은 현실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현실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각자 다른 역할을 부여 받아 책의 세계 속에서 등장했고, 등장인물이 된 그들은 미후유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미후유는 본래는 이야기 속에 없어야 할 사람, 아직 이야기에 녹아들지 못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다소 혼란스럽긴 했지만, 미후유는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책의 세계가 정한 규칙대로 분주하게 범인을 찾아 다닌다.
집에 있어도 모르는 세계로 데려가주는 이야기. 탑에 갇힌 공주의 이야기나, 괴물이 들끓는 위험한 길을 가는 용사의 이야기, 작은 곰이 마을 사람들에게 우편물을 전달해주는 이야기, 마녀와 겨울에 지배당하는 이야기.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둔 구멍 속에서 사랑했던 이야기들이 되살아났다. 마시로와 함께 이야기 세계를 누비던 때, 미후유는 그 옛날처럼 가슴이 뛰었고, 애정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더 읽고 싶었다. 즐거웠다. p.356
후카미도리 노와키의 작품은 <전쟁터의 요리사들>이라는 이야기로 처음 만났었다. 전쟁터의 조리병을 주인공으로 전쟁터라는 비일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매우 소소한 미스터리를 그린 작품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비일상인 곳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된다는 것이 아주 흥미로웠던 작품이었다. 이후 <무죄의 여름>, <신은 어디에 있는가> 등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었는데, 기존 작품들에 비해 이번에 만난 <이 책을 훔치는 자는>이라는 작품은 조금더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실제 작가가 '손이 가는 대로 자유롭고 즐겁게 쓴 작품'이라고 '쓰는 내내 너무나 재미있었기 때문에 ‘이래도 괜찮으려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하니 말이다.
극중 미후유가 “아아! 읽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이래서 책은 싫다니까!”라고 말하는데, 긴 모험을 겪고 나서는 자신이 어렸을 때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어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린 시절 그림책을 읽을 때만 해도 눈을 반짝거리며 이야기 속 세계에 푹 빠져들었지만, 점차 나이를 먹으면서 학교 공부로 인해, 혹은 부모님의 학업에 대한 기대나 요구사항 때문에 책을 멀리하게 되곤 하니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보며 책을 읽는 즐거움을 잊어 버리지 않는 어른이 된다면 좋을 텐데, 싶은 마음이 새삼 들었던 것 같다. 책을 좋아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 책의 세계를 직접 경험해보면 어떨까 상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설레이는 상상을 현실로 구현한 판타지 소설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으로 잠시나마 현실 도피의 즐거움을 만끽해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