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라와 아키라
이케이도 준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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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아키라는 저도 모르게 외삼촌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외삼촌은 어쩐지 겸허한 표정을 지었다. "아키라는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해. 즐거운 일도 있겠지만 괴로울 때도 있겠지. 하지만 거기에 맞서 싸워 이겨야만 해. 그게 인생이야."
"지면 어떻게 되는데?" 아키라는 물어보았다.
"지면? 외삼촌은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것 역시 인생일지 모르지." 아빠는 진 거야? 아키라는 그런 질문을 삼켰다.          p.60

 

태어난 곳도, 자라난 환경도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두 명의 아키라가 있다. 야마자키 아키라, 영세공장 '야마자키 프레스 공업'을 운영하는 공장주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가 경영하던 공장이 도산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야반도주하듯 집을 떠났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가이도 아키라, 대형 해운업 '도카이해운' 집안의 장남이다. 자연스럽게 후계자가 될 운명이었지만, 차기 사장 자리를 거부하고 자신이 관심가는 회사에 지원한다.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아키라는 소위 흙수저와 금수저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두 사람의 환경은 능력이나 노력 여하에 따라 크게 바뀌지 못할 만큼, 정해진 운명처럼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현실의 파도에 휩쓸려 흘러가는 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운명을 바꾸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두 삼촌과 아버지가 서로 미워하고 차갑게 견제하는 걸 보며 자란 가이도는 유복하다는 것이 동시에 그에 합당한 운명을 짊어진다는 뜻이라는 것을 보고 배웠다. 아버지와 삼촌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런 운명을 짊어진 것처럼 자신과 동생 또한 앞으로 그 길로 가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이도는 그러한 자신의 운명이 지독하게 싫었다. 야마자키는 아버지의 회사를 보면서 약한 자는 어째서 약한지, 항상 의문을 품었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장사의 꿈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과 아버지를 냉혹하게 대한 은행과 가차 없이 빚을 독촉하러 왔던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에, 그만한 실력을 갖추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두 아키라는 일본의 대형 은행에 동시에 입사하게 되고, 야마자키는 돈이 아닌 사람을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가이도는 돈은 사람을 위해 빌려주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뛰어난 실력을 선보인다. 하지만 그들 앞에 가혹한 시련이 들이닥치고, 두 아키라는 각자의 인생을 건 싸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야마자키 아키라라는 걸출한 뱅커의 눈으로 본 하나의 우주였다. 마이크로 수준의 분석으로부터 모든 방향으로 쏘아올린 논리의 화살. 그것이 기상천외하면서도 의문의 여지 없이 마땅한 필연성과 결합해 화려하고도 대담한 결론으로 집약되어간다. 끝까지 읽은 뒤에도 간나는 한동안 그 품의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연하게 머릿속 어딘가로 제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적확한 업무 처리,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 그것은 매일 옆에서 보았으니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이것은...... 차원이 다르다.              p.566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를 비롯해서, <변두리 로켓> 시리즈와 <일곱 개의 회의>, <루스벨트 게임>, <하늘을 나는 타이어> 등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직장인들의 통쾌한 반란과 도전을 탄탄한 구성과 생생한 캐릭터로 그려냈었던 이케이도 준의 신작이다. 이케이도 준의 작품들은 언제나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는데, 이번에도 육백여 페이지 가까이 되었지만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 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나 흥미로웠던 것은 두 명의 주인공이 경쟁 구도가 아니라 각자의 계층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어린 시절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 두 번을 거쳐 성인이 되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의 신입 사원 연수에서 파이널에 오른 두 팀으로 만나는 게 전부다. 그렇게 시종일관 각자의 인생을 살다가 후반부에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두 사람의 삶이 제대로 교차한다. 이름은 같은데 한 쪽은 풍족한 삶을 살아왔고, 나머지 한쪽은 힘겨운 삶을 헤쳐왔다면 라이벌 구도로 가는 서사가 대부분일 텐데, 이 작품은 보기 좋게 예상을 벗어나는 것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게다가 이케이도 준 특유의 현실적인 디테일들이 차곡차곡 드라마를 쌓아 가며 197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경제적인 혼란으로 얼룩진 시대를 그려가고 있기 때문에 그 몰입감도 대단하다.

 

이 작품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3년에 걸쳐 연재된 작품으로, 연재가 끝나고 8년 후 무카이 오사무, 사이토 다쿠미 주연의 TV 드라마 <아키라와 아키라>로 영상화되면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2022년에는 다케우치 료마, 요코하마 류세이 주연으로 동명의 영화가 제작, 공개되었다고 한다. 이케이도 준의 작품들은 영상화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만큼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많고, 캐릭터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누계 부수 100만 부 이상 판매된 작품이기도 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난하다고 마냥 불행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부유하다고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점을 두 주인공을 통해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두 아키라가 30년에 걸쳐 성장하는 과정은 인물의 서사라는 관점에서도, 시대를 관통하는 경제적인 흐름으로 읽더라도 매우 흥미롭다. 부잣집 소년과 가난한 소년, 두 아이가 자신의 운명에 맞서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순응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수십년 뒤에도 여전히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주어진 운명에 맞섰고, 온갖 수라장을 겪으면서 성장해나간다. 이케이도 준은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가장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작가답게 이 작품에서도 극강의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재미있는 소설을 찾는다면, 이케이도 준의 작품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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