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 일기 - 시간 죽이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2
송승언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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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삶으로 대하라는 권유. 나는 그 권유를 충실히 받아들였다. 나는 <레드 데드 리뎀션 2>를 하는 내내 즐겁지 않았다. 어떤 재미있는, 신나는, 멋진, 잘 만든 게임들을 할 때 느끼는 즐거움을 <레드 데드 리뎀션 2>를 하면서는 얻지 못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나는 이 게임에 몰입했다. 이 게임을 하는 동안 나는 잠시나마 서부 시대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 앞서 말한 '게임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거기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일은 꽤 복잡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악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p.36

 

김희선 작가의 <밤의 약국>에 이은 핀에세이 두 번째 작품이다. 송승언 시인은 '나는 정말로 오타쿠가 아니다'라고 '오타쿠가 될 만큼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고 단언하며 이 책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 뒤로 몇 페이지만 읽어 보아도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게임과 애니메이션, 웹툰, 영화, 드라마에 대한 취향의 나열로도 모자라 RPG게임을 위해 팀 모임을 할 정도이니 누가 봐도 오타쿠잖아 싶을 테니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여타의 '덕질'을 소재로 하고 있는 책들이 열정과 뜨거움으로 버무려져 있는데 비해, 송승언 시인의 덕질은 대상과 서늘한 거리를 유지하고,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딱 표지 일러스트 속 주인공의 시니컬한 표정처럼 말이다.

 

이 책은 게임 편, 애니메이션 편, 웹툰, 영화, 드라마 편, 그 밖의 취미 편으로 챕터를 나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세상에 수많은 게임들 중에 제대로 해 본 게 몇 개 안 되는 나로서는 게임 편에 대한 글들은 거의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면서 읽었다. 각각의 게임들에 대한 장단점과 특이점에 대해 디테일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들 게임을 해봤거나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게임들이 거의 다였기에, 조금 어려웠다. 그나마 애니메이션으로 가면 조금 상황은 나아지는데, 그래도 애니메이션을 막 챙겨보는 편은 아니라서 작품에 대한 집요하고도 치밀한 분석들이 호기심을 유발시키진 못했다. 이어지는 웹툰, 영화, 드라마와 그 밖의 취미 편으로 가면 읽기가 조금 수월해지는데, 읽다 보면 또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송승언 시인은 오타쿠적인 부분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대체 왜 자신은 오타쿠가 아니라고 하는 걸까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 한편 약간은 꼬인 상상을 해볼 수도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까닭은 행복하지 않을 자유 또한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떨 때는 숨 쉬는 것만으로도 피곤한 게 삶인데, 행복을 열심히 좇지 않을 자유마저 없는 세상이라면 불행이라는 단어보다 더 불행한 단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왜 갑자기 분수에도 없는 행복 타령을 하고 있는 걸까. 행복이 의무인 세계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참이기 때문이다.           p.263

 

이 책을 구매하면 <송승언의 덕후 외전-내가 만난 유령들>이라는 미공개 에세이를 담은 얇은 책자를 받을 수 있다. 기이하고 으스스한 존재인 유령은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가끔 그 기운을 느끼게 한다. 시인은 이 글 역시 '어릴 적부터 유령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는 부정의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유령 따위 존재할 리가 없다는 그의 생각에 상해를 입힌 사건이 있었다고 하니 더 흥미로워졌다. 여기 수록된 글들은 그가 유령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한 여러 결과물 중 일부라고 한다. 야광이라 밤이면 녹색으로 빛나는 레고 블록 세트 '마법의 성', 게임팩 대여점에서 빌려 결국 악몽으로 남아 있는 게임 '고스트버스터즈', 그 외에도 유령과 관련된 게임, 영화에 관한 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히려 본 책보다 이 작은 책자에 담긴 외전을 더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유는 내가 유령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개인의 취향이 있고, '덕질'은 보편적인 사회 현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인데, 이런 방식의 덕질도 있구나 색다른 기분으로 읽었던 작품이다. 시인의 방대한 취미의 편린이 담긴 모험일지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그다지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덕질은 바로 그렇게 누군가한테는 쓸데없고, 쓸모 없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탕진하는 데 진심인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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