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미야모토 테루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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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그 식당 주인을 <시부에 추사이>처럼 톺아보면 등장 인물이 수천 명에 이르리라. 특히 중요한 인물로만 범위를 좁혀도 수백 명. 주인의 남편, 아들, 딸, 친척, 친구, 또 그들의 가족..... 증조부, 증조모, 또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자매와 친구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공로와 죄과를 남겼는가.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저 노부인이 '있다'. 나 같은 평범한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여기 지금 마키노 고헤가 '있는' 것은 과거에 숱한 사람들과 그들이 살았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p.63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 받겠다고 마음 먹고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채 중화소바집을 운영해온 고헤는 결혼하고 삼십 년 동안 가게를 함께 꾸려온 아내와 갑작스레 사별하게 되자, 미련 없이 가게 문을 닫는다. 만사에 의욕을 잃은 채 장기 휴업중이던 어느 날, 읽기를 미뤄둔 두꺼운 책을 뒤적이다 아내에게 왔던 오래된 엽서 한 장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해변인 듯 보이는 손그림과 등대 순례를 다녀왔다는 몇 줄의 인사가 적혀 있다. 아내는 왜 엽서를 자신이 보관하지 않고, 고헤의 책에 끼워두었을까. 고민하던 차에 자신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었던 친구가 갑작스럽게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그렇게 아내의 엽서와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고헤는 등대 여행을 떠나게 된다.

 

딱히 등대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은둔 생활을 벗어나 뭐라도 이유를 만들어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차와 버스를 타고, 때로는 렌터카를 운전해 등대를 찾아가는 여행은 그에게 일상의 소중함과 행복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어 준다. 등대가 비바람과 안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도록 불빛을 비춰주는 것처럼 고헤의 삶에도 조용히 길을 내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등대 자체의 아름다움과 어딘지 외로워 보이는 고고한 자태에 마음을 빼앗겨 보기도 하고, 난생 처음으로 혼자 여행하는 즐거움도 배우고, 나고야에서 회사 생활을 하는 아들과 모처럼 동행하기도 하고, 지기지우인 오랜 친구의 십대 아들과 여정을 같이하기도 한다. 서른 살의 아내가 모르는 사람한테 엽서를 받았고, 그 후 30년이 지난 뒤 아내와 등대라는 막연한 두 가지만으로 시작한 여행에서 고헤는 아주 특별한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는 여유 없이 앞만 보며 달려온 지난 세월을 뒤로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주변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놀랄 만큼의 행복 따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람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소공자>를 처음 읽었던 스물일곱 살 때, 고헤는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마흔을 넘길 즈음 과연 세상에는 놀랄 만큼의 행복이 널려 있는 걸 알게 됐다. 이를테면? 하고 물으면 설명하기 곤란할 정도로 숱한 행복이.         p.223

 

일본 서정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미야모토 테루는 <환상의 빛>, <금수>,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등의 작품으로 특유의 담백하고, 잔잔한 감성을 보여줬었다. 이번 작품에서도 서툴고 평범한 사람들의 선한 일상을 물 흐르듯이 유려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나 좋았던 것은 내 주변의 사람들, 그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떤 존재인지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었다. 아버지 덕분에 맛있는 중화소바 만드는 비법을 배웠고, 부지런한 아내 덕분에 힘든 줄 모르고 가게를 꾸려왔으며, 친구인 간짱이 독서를 권해주었던 덕분에 고등학교를 중퇴했지만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고헤는 깨닫는다. 여기 지금 내가 '있는'것은 과거의 숱한 사람들과 그들이 살았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묵직하게 여운처럼 남았다.

 

미야모토 테루는 고헤의 여정을 통해서 매일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성실히 해내고 있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다정하고, 따뜻하게 말이다. 누구나 살면서 상실을 겪게 된다. 그럴 때 어두움 바다 위에서 고요하게 빛을 비추어주는 등대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혹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러한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살면서 놀랄 만큼의 행복이 도처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누구의 인생에나 넉넉한 행복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잔잔하고, 아름답고, 기품있게 흘러가는 미야모토 테루의 선한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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