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블랙 쇼맨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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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지 마. 가즈미는 어디 있지? 당신은 알 거 아냐?'
'그래, 잘 알지. 진짜 가즈미는 죽었어.'
다케우치는 고래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그랬군. 언제 어디서 죽었지?'
'언제? 어디서? 무슨 소리야? 그건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무슨 소리지?'                 - '맨션의 여자' 중에서, p.50

 

도쿄의 후미진 골목에 간판도 없이 운영되는 비밀 아지트 같은 곳이 있다. '트랩핸드'는 과거 미국에서 잘 나가던 마술사 가미오 다케시가 운영 중인 바로 카운터석과 안쪽에 탁자가 하나 있는 작은 가게이다. 그곳에서 다케시는 바텐더를 하면서 손님들을 응대한다. 키가 크고 얼굴도 멀끔하고 모델처럼 스타일이 좋은 다케시에게는 타인의 속임수를 간파하거나, 수수께끼나 음모를 해결하는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전작인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에서는 조카와 함께 형이 살해된 사건의 진범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트랩 핸드를 찾은 수상한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마요가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해서 반가웠다.

 

건축사인 마요는 리모델링 의뢰를 맡게 된다. 방 두 개짜리 맨션을 사서 리노베이션을 맡긴 미모의 여자는 엄청난 부자로 보였지만, 어딘가 비밀이 많은 사람같았다. 다음 번 상담을 둘이서 조용히 얘기할 만한 곳에서 하고 싶다는 요청에 마요는 삼촌인 다케시에게 부탁한다. 마요에게 대략의 사정을 듣게 된 다케시는 의뢰인이 어딘가 수상하다는 데 동의하고 장소를 빌려 주는데, 남편의 죽음으로 막대한 금액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의뢰인의 취향이 이상했다. 세 종류의 플랜을 준비했는데, 과감한 콘센트와 심플한 콘셉트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견적은 제일 비싸지만 평범하고 지루한 디자인을 고른 것이다. 의뢰인의 취향을 의심하는 마요에게 다케시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미망인이 유산을 물 쓰듯 쓰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거라고. 문제는 그 남아도는 돈이 어떻게 하면 나한테까지 흘러오게 하느냐라고 말이다. 자, 과연 마요가 맡은 의뢰는 누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어지게 될지, 이후 이야기는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급 전개 되기 시작한다.

 

 

 

"무엇이 행복이라 여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죠." 가미오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히노 씨에게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피 흘릴 것도 각오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건 정말 멋진 일이죠. 안 그런가요?"             - '환상의 여자' 중에서, p.228~229

 

이 작품에는 블랙 쇼맨이 등장하는 세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돈 많은 미망인과 그녀를 스토킹하는 의문의 남성, 사귈까 말까 고민하는 첫 데이트 중인 커플,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한 재즈 뮤지션의 비밀 연인이 등장해 각자의 사연이 전개된다. 다케시는 거짓말을 꿰뚫어 보고, 마술 같은 트릭을 쓰고, 인물의 얼굴이나 특정 부위를 합성할 수 있는 신기술 ‘딥페이크’를 활용하는 등 각자의 사건 해결을 위해 능력을 발휘한다. 다케시는 전작에서도 형사 행세를 하며 주변 이웃을 탐문 조사한다던가, 스마트폰의 암호를 슬쩍 보는 것만으로 알아 맞추고, 무대 위의 화려한 마술사만큼이나 멋진 솜씨를 선보이며 사건을 추리해 나갔었다. 매사에 자신감 넘치고, 괴팍했던 성격 역시 여전한데, 그 모습 그대로 이번 작품에서도 특유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작가의 제안으로 전 세계 최초 공개, 한국 단독 선출간이라는 점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지만, 구성이나 분량 모든 면에서 조금 가볍게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코로나 이후의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낸 것도 화제였던 전작에 비해 가볍게 에피소드 위주로 풀어 나가는 단편이라 앞으로 이어질 블랙 쇼맨 시리즈의 장편 신작을 만나기 전에 브릿지 정도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고 말이다. 요즘 히가시노 게이고가 가장 공들여 만들고 있는 캐릭터가 블랙 쇼맨이라고 하니, 아마도 더 묵직한 다음 이야기를 위한 워밍업의 개념이라도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이례적으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을 빨리 만나게 된 거라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반가운 마음부터 들 것이다. 속도감 있는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호흡에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블랙 쇼맨 시리즈의 다음 장편을 고대하며 이 작품을 읽어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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