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4
허먼 멜빌 지음, 레이먼드 비숍 그림,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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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고상한 비극에서 감동적인 역할을, 우아한 희극에서 쉽고 간단한 역할을, 익살극에서 쾌활한 역할을 맡을 때, '운명'이라는 무대 감독은 왜 내게 포경선 선원이라는 초라한 역할을 맡겼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가장 결정적인 동기는 거대한 고래 자체의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이었다. 경이롭고 신비한 그 괴물은 내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덩치가 섬만 한 고래가 헤엄치는 거칠고 먼 바다, 그 고래가 가져오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위험들, 게다가 파타고니아에서 고래를 보고 그 소리를 들었다는 무수한 목격담, 이런 것들이 바다를 향한 나의 소망에 불을 붙였다.         p.42

 

이슈메일은 몇 년 전 돈이 다 떨어져가고, 육지에 딱히 흥미로운 일도 없어, 배를 타고 나가서 세상의 바다를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고래잡이배인 포경선을 타기로 한 것은 거대한 고래에 대한 매혹때문이기도 했고, 머나먼 것들을 끊임없이 동경하고 갈망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래잡이라는 고난과 형벌을 자처하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항해를 시작하기 전에 머무르는 뉴베드퍼드에 도착한다. 황량한 거리 한 켠에 괴상하게 생긴 물보라 여관이 있었고, 그곳에서 두개골 장사꾼인 작살잡이와 한 방을 쓰게 된다. 온 몸이 이상한 문신으로 뒤덮인 야만인인 그가 두려웠지만 함께 지내며 차츰 허물없이 이야기를 하게 되는 사이가 되었고, 그와 함께 배에 오르게 된다.

 

 

그들이 탄 배의 선장 에이해브는 다리가 한쪽밖에 없는 인물로, 오래 전 고래 때문에 한쪽 다리를 잃었다. 배를 산산조각 내온 고래들 가운데 가장 괴물 같은 놈이 선장의 다리를 물어뜯고 삼켜버린 것이다. 에이브해는 흰 고래 모비 딕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항해를 하는 중이었다. 에이브해는 선원들을 모아놓고 말한다. 16달러짜리 금화를 걸고, 흰 고래가 나타나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하는 이에게 보상으로 주겠다고 말이다. 그러니 눈알이 빠지도록 흰 고래를 찾으라고, 흰 물결을 놓치지 말고, 흰 거품만 보여도 큰 소리로 외치라고 말이다. 그는 자신을 영원히 불쌍한 절름발이 느림보처럼 살게 만든 모비딕을 저주했다.

 

 

에이해브는 그 사악한 힘에 굴복하거나 숭배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친 듯이 날뛰며 모든 악의 근원이 흰 고래라고 생각했고, 불구의 몸에도 불구하고 논과의 대결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한번 놈과 정면으로 맞붙으려 했다. 사람을 가장 미치게 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 가라앉은 앙금을 휘저어 떠오르게 하는 모든 것, 악의를 내포한 모든 진실, 근육을 못 쓰게 하고 머리를 굳게 하는 모든 것, 삶과 생각 속에 교묘하게 작용하는 악마성 등 모든 악이 광분하는 에이해브에게는 모비 딕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고 이제 그놈을 공격해 죽이기만 하면 되었다.         p.246

 

모비딕에 대한 복수심에 휩싸여 점점 더 광기를 발산하는 에이해브 선장과 완전히 정반대 지점에 있는 것은 이성적이고 신중한 성격의 일등 항해서 스타벅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더라도 모비딕을 추격할 거라는 에이해브에게 스타벅은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한테 복수라니 미친 짓이라고, 녀석은 그저 맹목적인 본능으로 선장님을 공격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항해 중에 혹시 모비딕을 마주친다면 당연히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건 향유고래를 잡기 위해서지 선장님의 복수를 대신 해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말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에 대한 증오심에 휩싸여 있는 선장에게 스타벅의 충고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지만 말이다.

 

사실 에이해브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수단은 모두 온당하지만 동기와 목적이 미쳐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의 편집광적 증상은 다리를 잃었던 순간 즉시 생긴 것은 아니었다. 소설은 그의 숨겨진 자아가 미쳐 날뛰며, 광기로 깊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다. 그로인해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에이해브 선장이 될 수도 있었다고, 흰 고래가 상징하는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할 수도 있는 무언가를 함께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해준다.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로 출간된 <모비딕>에는 특별한 점이 있다. 바로 국내 최초 ‘레이먼드 비숍’ 목판화 일러스트 29점을 수록한 완역본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책의 시작 부분에는 이 작품의 이해를 돕는 당시의 판화들 수록해, 현대의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19세기 포경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역자의 꼼꼼한 각주와 이 작품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한 역자 해제 역시 <모비딕>을 더욱 풍부하게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모비딕>을 해양모험소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면, 제대로 된 번역으로 만나는 이 작품을 통해 풍부한 은유와 철학적 탐구, 그리고 기존에 없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형식에서 감탄하게 읽게 될 것 같다. 허먼 멜빌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되어 쓰인 작품이라 바다 생활과 당시의 포경업 전반에 대한 묘사도 매우 생생하고 디테일하다. 얼마 전에 종영된 드라마 덕분에 <모비딕>과 고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지금이야말로 불후의 고전인 이 작품을 읽어보기에 딱 좋은 시기가 아닌가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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