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 경계인이 바라본 반세기
도널드 리치 지음, 박경환.윤영수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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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복장과 마찬가지로 기모노 또한 보이는 것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른 모든 언어가 그렇듯 옷차림에 관련된 언어는 뉘앙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기모노는 여러 의미로 옷의 주인을 정의한다. 몸에 딱 맞춰 만들어지지는 않지만, 기모노는 그 어떤 옷과도 다른 방식으로 몸을 휘감고, 제한하고, 받쳐준다... 특히 여성의 기모노는 몸에 꽉 끼는 데다 겹겹으로 덧입은 속옷 위에 비로소 기모노를 입기 때문에 마치 몸의 형태를 기록해놓은 껍데기 같다.           p.74

 

도널드 리치는 일본에 오랫동안 거주하며 일본 문화와 영화에 대해 글을 써왔다. 국내에는 영화평론가로 더 많이 알려졌을 텐데, 부산 국제영화제의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으로 내한하기도 했었다. 그는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평생 대부분의 시간을 일본에서 생활했는데, 특히나 오스 야스지로와 구로사와 아키라를 영어권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걸로도 잘 알려져 있다. 관련 저서도 꽤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국내에 책으로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은 도널드 리치가 1960년대부터 50여 년에 걸쳐 일본 문화의 다양한 단면에 대해 쓴 산문 중에서 20편을 골라 수록했다. 이방인의 시각으로 관찰한 일본의 반세기는 어떨까. 일본 영화, 파친코, 패션, 키스, 망가, 공간, 열차, 자동차 문화와 일본 여성 등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깊이 있는 통찰력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특히나 영화 평론가 답게 영화를 통해서 설명해 주는 대목들이 많아 더 쉽게 잘 이해가 되었고, 문장력이 워낙 뛰어나서 일본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마저 훅 빠져 들어서 읽게 만드는 글이었다.

 

 

 

일본은 죽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놓는다. 아마도 그래서 죽음을 그렇게나 많이 다루는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극이나 시를 보면 죽음은 일상적인 주제 중 하나다. 언젠가 어떤 이가 일본인은 고대 이집트인만큼이나 죽음에 집착한다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집착은 쫓기고, 괴롭힘 당하고, 사로잡히는 것을 뜻한다. 일본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보다는, 그러고 보니 고대 이집트인들도 그랬지만, 일본은 죽음을 축하하고 받아들인다. 오히려 삶에 집착한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p.266~267

 

일본인은 패턴화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 패턴화된 사람들이라고, 도널드 리치는 말한다. 일본어에는 형식적인 관용구가 많이 쓰이고, 일본은 여전히 제복을 입는 몇 안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잘 개간된 땅은 산과 산 사이로 모양을 이루고, 눈을 두는 곳마다 보이는 패턴은 일본의 모습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생각이나 행동의 형식이 그 내용만큼이나 중요해, 정해진 형식에 따라 각 부분의 모습이 정해지고, 그러한 삶의 모습이 모여 일본이라는 나라의 전체적인 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는 보이는 모든 곳에 있는 듯 많은 표지판과 문자에서도 드러나고, 기모노를 비롯한 옷차림의 언어 또한 그러하다.

 

온갖 규칙으로 가득한 일본에서 외국인이었던 도널드 리치는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타고난 관찰자였던 그는 일본어를 전혀 몰랐던 시기에도 열심히 극장을 드나들다가 일본 영화의 비언어적 요소들을 관찰하게 되었고, 그 독특한 문법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미국과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이방인의 시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거 객관적으로 관찰해 시각적 특성을 더 두드러지게 볼 수 있게 된다. 일본은 구조적으로 공백이 전체를 받치고 있는 나라이고, 도널드 리치는 족자 그림이든 현대의 광고든 거기엔 빈 공간이 왜 그리 많은 것인지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일본인은 비어 있음에 몰두해 생겨나는 가득함을 통해 발전해왔다는 결론에 이른다. '비어 있음에서 가득함을 보는 것은 창조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해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 사유의 과정이 너무도 우아하고, 정갈하며, 아름답기까지해서 매 순간 감탄하면서 읽었다. 도널드 리치의 다른 저서들도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정말 수준 높은 문장과 통찰력으로 일본의 문화와 역사를 사유하는 시간을 놀라운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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