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곳은 무덤이었다
민이안 지음 / 북폴리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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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부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나도 여전히 나라고 할 수 있어? 인간인 주인님도 그런 나를 예전의 나와 같다고 인정해 주실까? 너 같은 최신형들은 어떻게 생각하도록 프로그램되었는지 모르겠는데, 구형인 우리한테는 꽤나 어려운 문제거든."
달의 진지한 대답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저 막연히 매우 높은 인공 지능을 가진 로봇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깊은 사고와 관념적 고민을 지닌 존재를 단순히 기계라고 치부해도 괜찮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p.47~48

 

나는 온 세상이 새하얀 덩어리 천지인 곳에서 눈을 뜬다. 정체 모를 새하얀 덩어리들 사이 어딘가에 끼어 있는 상태라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아래쪽으로 빛줄기가 길게 새어 들어왔고,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지며 겨우 팔과 다리를 빼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썬 비현실적인 광경과 마주하게 된다. 커다란 공터에 새하얀 마네킹들이 쌓여 작은 둔덕을 이루고 있었고, 쌓여 있는 마네킹의 산 속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안드로이드 세계 업사이클 센터로 일종의 쓰레기장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만난 구형 안드로이드 달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정체에 대해 깨닫게 된다. 파란 피 타입, 4세대, 일련번호 1101로 자신도 역시 인간이 아니라 안드로이드였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나는 스스로를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비록 내 몸은 현재 이런 상태지만, 나는 분명 인간이 맞다' 라고, 나는 자신이 왜 이런 몸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내려고 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 제대로 기억나는 것도 없고, 딱히 의지할 곳도 없었던 나는 달의 비밀스러운 임무(파란장미 찾기)에 동참하게 된다. 함께 여행하며 안드로이드인 달에게 인간적인 유대감을 표현하고, 임무를 모두 완수한 뒤에도 지금 처럼 곁에 있어 달라고, 계속 같이 있자고 말한다. 그들은 이 여정을 계속 함께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망가진 메모리의 백업 데이터를 찾고, 자신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될까.

 

 

 

그렇다면 협상을 해야만 했다. 내 곁에 있겠다는 선택지를 골랐을 때에 충분한 메리트가 될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제시하면서.
“나에게는 은혜를 갚고 싶어 하는 특성이 있어. 그러니까 네가 내 곁에 있어준다고 하면, 난 너와 함께 바다에 가는 명령어를 설정할 거야. 지금 아까워서 쉽게 지우지 못하고 있는 바다 속의 기억들, 전부 다 지워도 괜찮아. 나랑 다시 가서 채우면 되니까. 지구에서 가장 깊은 해구든, 지구에서 가장 뜨거운 열수분출구든, 너의 메모리에서 그 데이터가 지워질 때마다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그러니까, 계속 같이 있자.”       p.106

 

김초엽 작가의 작품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된 이후로 한국 작가들의 SF소설이 많아졌다. 덕분에 천선란, 정소연, 듀나, 배명훈 작가 등 다양한 색깔을 지닌 여러 스펙트럼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서 좋은 것 같다. 특히 최근에는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가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한국 SF소설이라는 장르가 더 주목받게 되었고 말이다. 물론 한국 SF소설의 계보는 꽤 오래 되었다. 하지만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라는 인식 탓에 그다지 많은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인데, 최근에 나오는 작품들은 동시대적 이슈를 적극 수용한 젊은 작가들의 선전에 힘입어 국내 SF소설의 대중화를 선도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최근 몇 년 사이에 SF 문학상도 속속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번에 만난 작품도 그렇게 발굴된 반짝반짝 빛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 제1회 SF소설 공모전 ‘상상 현실이 되다’의 대상작이다. 중편 정도의 분량으로 가볍게 읽히는 작품이지만, 과학적 상상력을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풀어내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한국 SF 소설이 주목받고 있는 지금,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SF라는 장르만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은, 현실을 넘나드는 상상력에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세상을 벗어나, SF라는 무한한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 보자.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파란 장미의 환상이야말로 우리가 책 속 페이지를 펼치고 있는 동안 내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모험이 되어줄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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